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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자 춘추]"300억 판타지" 안통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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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자 춘추]"300억 판타지" 안통하는 사회

입력
200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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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나는 감독, 작가, 주연 배우들과 함께 내년에 만들 영화의 시나리오 회의를 하러 지방에 갔다. 도시 속의 절을 무대로 300억원에 당첨된 로또를 놓고 스님들과 세속 인간들이 벌이는 소동 이야기를 다듬기 위해서였다.당첨금 액수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 아무리 영화지만 300억원은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10억원이나 30억원 정도가 적당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는 300억원을 고수했다. 상업영화는 리얼리티보다 대중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선정성이 우선이다, 선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최소 액수가 300억원이라고 주장했다. 300억원은 리얼리티이고, 2,000억원 정도는 돼야 판타지라고 우긴 끝에 겨우 양보를 끌어낼 수 있었다.

나는 대중의 판타지 속으로 쏘아 보낼 300억원을 이렇게 어렵게 마련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나는 불안하다. 대통령 측근비리, 대선자금 비리, 연예계와 스포츠 스타의 몸값, 젊은이들의 10억원 만들기 열풍 등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나라를 '억억'거리는 돈 뉴스의 홍수가 휩쓸고 있다. 150억원의 현찰을 트럭 채로 넘기는 차떼기가 속속들이 까발려지는 현실 앞에서 과연 300억원으로 대중의 판타지를 자극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만들려는 영화의 정체성이 엄청난 현실의 노도 속에 변질하고 있음을 절감한다. 나는 애시당초 돈을 소재로 동화 같은 판타지가 있는 코미디를 만들려고 의도했는데 어느덧 그것은 리얼리티의 뒷다리를 붙들고 사정하는 소박한 코미디가 돼 가고 있다. 참으로 따라잡기 힘든 리얼 코리아의 스피드! 이 땅에서 진정한 판타지 코미디는 정치인과 재벌만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지난 몇 달 간 나태한 선승처럼 '돈이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잡았다 놓았다 했다. 어느날 문득 이런 감상적 영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 돈이란 저 숲에 내리는 가을비 같은 거야, 저 빈 들에 내리는 첫눈 같은 거야. 골고루 적시고 골고루 쌓이고 남은 것은 흐르고 녹아서 다시 하늘로 오르고…" 이런 순진한 화상하곤. 이제 좀 이해가 간다. 감각 좋은 영화인들이 왜 분노와 복수로 대중의 판타지를 자극하려 하는지.

조 철 현 타이거픽쳐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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