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오후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서울 청담동의 한 카페. 지난 10월 아시아시즌최다 홈런신기록(56호)을 세울 당시보다 최근 일본프로야구 진출결정으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국민타자' 이승엽(27). 갈색 재킷을 걸친 말쑥한 차림의 이승엽이 홀 안으로 들어서자 주말을 맞아 한창 들떠있던 젊은 남녀들이 술렁거렸다. 이승엽을 알아 본 이들은 "일본 가서 꼭 홈런을 쳐주세요"라며 덕담을 건넸고, 이승엽은 쑥스러운 듯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잠시 후 녹차 향기가 가득찬 룸에 자리를 잡은 이승엽은 모처럼만의 여유 속에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일본어도 잘 못할텐데 공부하고 있냐고 묻자 "진로를 결정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무슨 일본어냐"며 마음고생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조심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승엽은 이어 "쉬운 회화정도는 할 수 있어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강한 의욕을 내비쳤다.
―일본진출은 다소 의외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힘겨웠던 점은.
"돈 때문에 미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간다는 여론이 가장 견디기 어려웠다. 우선 마이너리그라도 가서 후배들에게 선구자 역할을 해달라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9시즌이나 뛰었고 한국 최고의 타자다. 돈 문제는 결코 아니다. 한국 최고타자로서 그런 대우를 받고 가면 나중에 후배들도 그 이상 받을 수 없다.(메이저리그의 다저스는 이승엽에게 2년간 300만달러를 제의한 것으로 알려짐)"
―지금까지 얼마정도 벌었고 주로 어디 썼나. 일본 롯데로부터 실제 130억원대를 받는다는데.
"집 사고 차 사고 장가 가느라 많이 모으지는 못했다. 앞으로 아끼고 열심히 벌어서 은퇴 이후를 대비해야 겠다. 야구는 길어봐야 앞으로 10년 넘게는 못한다. 계약금, 연봉을 합쳐 5억엔(약55억원)이라는 것 외에는 매니저가 자세히 알고 있다. 팀 성적 외에 타점 및 타율 등 개인 인센티브 관련액수는 추후협상에서 늘어날 것 같다."
―일본행은 언제 결정했나.
"솔직히 3∼4일 전부터는 삼성에 남는 분위기였다. (일본행 기자회견 전날인) 10일 자정쯤 서울 처가집에 들러 짐을 챙긴 뒤 기자회견 장소인 리츠칼튼호텔로 향했다. 대구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국내에 남으라는 전화를 계속 받았고 김동준 J's 대표(이승엽의 국내대리인)와 호텔방에서 밤새 고민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새벽4시에 겨우 잠 들고 아침8시에 일어났지만 아침밥 먹을 엄두도 안 났다. 생각이 500번은 왔다 갔다 했다. 기자회견 직전에 아내에게 삼성에 남는다고 통보해줬는데 또 생각이 바뀌어 회견을 20여분 연기시켰고 결국 엘리베이터에서 후회없이 결심했다. 회견직후 아버지와 아내에게 일본 가기로 했다고 전화했다."
―일본 진출한 국내 선수 중 첫 해 잘한 경우는 한명도 없었다. 결과가 안 좋으면 팬들이 실망할텐데.
"그래서 처음부터 잘 준비해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잘 모르면서 큰소리부터 치고 싶진 않지만 첫인상이 안 좋으면 일본사람들도 한국야구를 우습게 볼 것이다. 투수들이 좋은 공을 안주겠지만 빨리 적응해서 홈런왕에 도전하겠다. (비장한 표정으로 지으며)2년내 홈런왕이 아니라 내년 전반기부터, 아니 3월 시범경기때부터 뭔가를 보여주겠다. 후반기까지 갈 것도 없다."
―변화구와 몸쪽공에 약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본에서는 치명적이지 않나.
"약점이 없는 타자는 없다. 그것은 데이터일 뿐이다. 그곳에서 뛰는 알렉스 카브레라나 우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떻게 홈런을 40∼50개씩 쳤겠나. 아직 일본야구를 잘 몰라서 일단 2할9푼, 30홈런 목표를 세웠다. 시범경기를 해보면 감이 잡힐 것이다. 곧 주요 투수들 비디오분석에 들어간다."
―일본에서 잘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큰 것 같은데.
"부담감보다는 대한민국 대표타자로서 책임감이 크다. 박찬호나 김병현이 미국 가서 잘 할지 누가 알았나. 이종범이 실패할 지 누가 알았나. 단 종범이 형은 일본투수가 공을 몸에 맞추지 않았다면 지금 일본에서 펄펄 날고 있을 것이다.(이종범은 98년 빈볼에 맞아 부상한 후 회복하지 못한 채 일본 생활을 마감) 외국인 선수에 대한 텃새가 심하다고 하지만 야구만 잘 하면 문제 없다는 신념으로 밀고 나갈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가졌나.
"99년 일본의 왕정치가 갖고 있던 아시아시즌 최다홈런기록(55호) 경신여부로 한창 매스컴에 오르내릴 때 일본진출에 관심을 가졌었다. 일본선수들은 우리와 체격조건이 비슷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파워가 부족해서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초 미국 스프링캠프에 가서 시범경기때 홈런을 쳐낸 뒤 해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종착지는 메이저리그라고 했는데.
"일본은 중간기착지다. 말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선은 일본에서 잘 해야 하기 때문에 빅리그 생각은 일체 안 하겠다."
―존경하는 스승은. 김응용 삼성감독과 불화설도 있었는데.
"(흠칫 놀라며)김응용 감독 불화설은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뭔가를 들킨듯한 표정을 지으며)그런 것 없다. 다만 김 감독님과는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지만 대화가 많은 편은 아니다. 아직 연락을 못 드렸다. 일본에서 성공한 백인천 전 롯데감독님을 제일 존경한다. 백 감독님께 상의했더니 일본프로야구에서 주의할 점을 정리해 편지로 보내주신다고 했고 '네 실력으로 문제없다'고 다독거려 주셨다."
―떠나는 마당에 가장 두려웠던 국내 투수는.
"이혜천(24·두산 좌완)이다. 공이 지저분하고 컨트롤도 제멋대로여서 치기 까다롭다."
―현역 이후 계획은.
"야구선수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은퇴해서는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싶다. 사업 같은 것은 꿈도 안 꾼다. 국내로 돌아와 삼성 감독이 되는 게 소망이다."
―아내의 좋은 점과 결점, 아이가 일본에서 태어날지도 모르는데.
"마음씨 착한 아내에게 더 바랄게 있나. 장어구이, 샤브샤브 등 음식도 잘 한다. 라면을 잘 못 끓이는게 단점인데, 물 조절을 못한다. 아이는 천천히 낳을 생각이지만 (몇 명 낳을 지는) 정해놓진 않았다. (웃으며)낳고 싶어도 마음대로 될지…."
/박석원기자 spark@hk.co.kr
● 아내 이송정씨가 본 이승엽
"고통스럽고 피말렸던 그 순간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요. 그동안 오빠랑 뽀뽀 한 번 제대로 못했어요."
'국민타자' 이승엽(27)이 일본행을 선택하기까지 힘겨운 결단의 과정을 함께 겪은 부인 이송정(21)씨는 한꺼번에 긴장이 풀린 탓인지 심한 감기 몸살을 앓고 있었다. 두통이 심한데다 어지러움 증세까지 겹친 이씨는 서 있기도 벅차보였다. "얼굴이 초췌해 화장이 안 받는다"고 걱정했지만 미모는 변함이 없었다. 이송정씨는 끝내 이승엽과 동석하지 못하고 카페 앞 승용차 뒷좌석에 누운 채 인터뷰에 응했다.
6살 많은 남편을 여전히 '오빠'라고 부르는 이씨. 그는 "야구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람인만큼 일본에서도 꼭 해낼 것"이라고 자신했다. 앞으로 새롭게 펼쳐질 일본생활에 대해서는 "기대 반 설렘 반"이라고 표현했다. "국내 팬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고 내조할 생각"이라고 당찬 각오를 털어놓기도 했다.
"기자회견이 예정된 (11일)오전 11시께 오빠가 한국에 남는다고 전화를 해 왔어요. 그리곤 순식간에 방향이 바뀌었어요." 이씨는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데 40∼50분정도 지나자 다시 핸드폰이 울렸어요. 오빠가 다급한 목소리로 일본에 가겠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 끊었어요"라며 긴박했던 당시를 회고했다.
이씨는 기자회견을 끝낸 남편을 만나자 왈칵 울음이 쏟아진 동시에 반가움이 교차했다. "보자마자 힘든 결정한 것을 축하한다고 했어요. 이제 마음 편하게 있자고 했죠. 오빠가 당장 운동을 시작한다고 해서 며칠 푹 쉬어야 한다고 말렸어요."
아내가 전하는 이승엽은 '바른생활의 사나이'다. 보약을 식사후 30분후에 먹으라고 하면 시계로 30분을 재고 정확히 30분후에 먹을 정도로 꼼꼼한 성격이다. "유일한 결점은 사소한 것에 티격태격하고 잘 삐친다는 점이죠."
/박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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