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은 모험이다. 모험이 성공했을 때 희열과 영광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만, 실패의 두려움과 부담도 크다. 더욱이 이미 정상에 오른 사람이라면 새로운 모험에 나서기가 망설여질 수밖에.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직을 맡고 있는 경희대 교수 금난새(56)씨는 30대에 국내 정상급 지휘자 반열에 올랐지만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쉼 없이 새 분야를 개척한 그는 점잔 빼는 클래식을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클래식으로 만든 '벤처 음악인'이다. '음악감독 겸 CEO'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그의 명함이 이를 웅변한다.30대 초반부터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로 이름을 날린 그가 도전을 거듭하고, 그때마다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단짝 친구 우성하(56·(주)삼영 전무)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8년 겨울. 금씨는 서울에서 열린 부산사범학교 부속초등학교 동창회에 우연히 참석하게 된다. 금씨는 2학년 때 서울로 전학했기 때문에 정식 동창회원은 아니었다. 금씨는 이 자리에서 30여년 만에 만난 성하씨를 대번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의 아버지가 각각 음악가와 미술가로 오랜 교분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
여기서 두 사람의 인연이 새로 시작된다. 금씨는 동창회에서 만난 지 얼마 안돼 우씨에게서 뜻밖의 선물을 받는다. 바로 자신에 대한 신문기사를 정리한 스크랩이었다. 우씨는 30여년 동안 금씨를 만나지 못했지만 어린시절 친구가 한국 음악계의 정상에 선 것을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에 대한 기사를 손수 정리해왔던 것.
"그것은 친구에 대한 관심을 넘어 진한 우정의 징표였습니다." 남에게 신세 지기를 싫어하는 금씨는 이후 우씨와 자주 만났지만 물질적 지원은 사양했다. 하지만 우씨의 아이디어와 조언만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클래식을 대중 속에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던 차에 성하씨가 구체적인 방법론을 주더군요. 그의 말 그대로 따랐죠." 우씨는 음악에 대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지만, 어떤 구상을 '프로젝트'로 사업화하는 데는 역시 프로였다. 6년간 전회 전석 매진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클래식의 대중화와 함께 지휘자 금난새를 스타덤에 올린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는 금씨의 도전정신과 우씨의 아이디어가 하나로 '화음'을 내 이뤄진 것이다.
금씨가 잘 나가던 KBS교향악단을 떠나 수원시립교향악단으로 옮긴 것이나, 연주회를 마치고 설문지를 돌려 관객의 반응을 확인하는 것, 공연 때 신참단원을 맨 앞줄에 내세우는 파격 역시 두 사람의 머리가 어울린 합작품이다. "사실 제가 어떤 생각을 내놓으면서도 스스로 황당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성하씨는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말끔하게 다듬어 추진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금씨는 우씨의 도움으로 클래식의 엄숙주의를 과감하게 파괴하고 청중 속으로 들어가는 새 장르를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금씨였지만 그에게도 한때 큰 시련이 다가온다. 98년 타의로 수원시향 상임지휘자에서 물러나게 되고, 단원 10여명이 그를 좇아 교향악단에서 나온 것. "직장을 그만둔 동료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더군요."
그때 우씨는 금씨에게 수익을 창출하는 '벤처 오케스트라'인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을 제안하고, 사무실도 정숙한 국립도서관 건물 내에 잡도록 주선했다. 사무실 임대료는 매월 한 차례씩 국립도서관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기업마인드를 도입한 유라시안은 곧바로 수익을 내는 국내 최초의 교향악단으로 성장했다.
금씨는 "성하씨가 없었다면 그 동안 새롭게 시도한 수많은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었을지 의문"이라며 "그는 나를 '벤처 음악인'으로 이끌어준 스승"이라고 말했다.
/송두영기자 dy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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