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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13> 박창영 갓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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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13> 박창영 갓방

입력
200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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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의 방에 들어가면 반드시 상석과 하석이 있으므로 그 구분을 알아차려 하석에 앉는 것이 백인으로서 조선사람에 대한 예의가 된다. 처음에는 어디가 상·하석인지 모르지만 비결이 있다. 관모(冠帽)를 넣어 둔 통이 걸려 있는 쪽을 상석으로 알면 대과 없다. 조선사람은 어떤 보배로운 물건보다 모자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항상 상석의 가장 높은 곳에 매어두기 마련이다.' 한말 프랑스인 신부가 남긴 기록이다. 갓은 외국인에게도 우리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의관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제는 박물관의 전시물로, TV드라마나 영화의 소품으로 밀려나고 말았다."갓은 조상들이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의관일 뿐 아니라 멋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선비들의 삶을 떠올리며 갓을 만들어온 삶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중요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 4호 갓일 입자장(笠子匠) 박창영(朴昌榮·61)씨에게 갓일은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만은 아니다. 선비들의 정신세계로 여행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4대째 120여년 동안 이어진 가업을 통해 박씨가 터득한 삶의 자세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의 허름한 2층 주택. 살림집에 갓방(공방)도 딸려 있다. 찾는 사람이야 뻔하니 상호도 필요 없다. 40년 넘게 갓일을 해온 박씨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박창영 갓방이지요" 라고 말한다. 안방에 잇닿아 있는 갓방은 서너 평에 불과하다. 100년 가까이 된 화로와 인두를 비롯, 작두, 칼, 짓다 만 갓들이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벽에는 태어난 지 한 세기가 넘는 여러 벌의 갓이 갓집에 담겨 걸려 있다.

그의 고향 예천 돌테마을(천북동)은 갓의 명산지로 유명했다. 어린 시절 마을의 80가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갓을 지어 목돈을 만졌다. 통영산에 버금갈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 상인들이 늘 들락거렸다.

박씨의 증조부가 시작한 갓일은 조부 대에 와선 부친의 3형제가 매달릴 만큼 주요 소득원이 됐다. 6남매중 셋째로 중학교를 나온 그는 10대 후반 부친에게 갓일을 배웠다. 그는 대구의 갓방에서 솜씨를 갈고 닦은 뒤 25세 때 고향에 갓방을 차렸다.

"60년대만 해도 시제를 앞둔 가을에는 없어서 못 팔았습니다. 현대화의 물결에 밀려 수요가 뚝 떨어지면서 좌절감도 커져 갔습니다. 어느날 TV에서 사극을 보는데 아이디어가 떠오르더군요." '그래, 방송사에 납품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그는 서울로 올라와 KBS 간부를 찾아간다. 78년엔 아예 살림살이를 서울로 옮겼다. 박씨도 젊은 시절 잠시 외도를 했다. 대구 갓방에서 일 할 때 취미 삼아 복싱을 시작했다. 밴텀급으로 뛴 그는 경북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

갓은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와 햇빛을 가리는 차양부분인 양태(凉太)로 이뤄진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대표적 관모의 하나로 3단계 공정을 거쳐 태어난다.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곱게 다듬은 세죽사(細竹絲)나 말총으로 모자를 만드는 일이 첫 공정이다. 이어 세죽사로 양태를 엮고 마지막으로 갓방에서 모자와 양태를 모아 갓을 완성한다. 갓을 모으는 작업에서 양태가 아래로 우긋하게 곡선을 이루도록 모양을 잡는 일이 가장 숙련을 필요로 한다. 이를 '버렁잡는다'는 말로 표현한다. 공정마다 장인이 따로 있다. 까다롭고 섬세한 공정을 모두 익히려면 짧게 잡아도 10년은 족히 걸린다. 현재 완성된 갓을 만들 수 있는 입자장은 박씨를 포함, 두 명뿐이다. 그나마 전업으로 삼는 장인은 박씨가 유일하다.

박씨는 갓방에서 쓰러진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갓방 인두 달 듯'이라는 속담이 있다. 인두가 언제나 뜨겁게 달아 있는 것처럼 혼자 애태우고 어쩔 줄 모른다는 뜻이지만 갓일의 어려움을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다. 장인들은 사시사철 인두와 화로를 끼고 산다. 특히 숯가스는 연탄보다 더 독하다. 혼자 작업하다 보니 일주일은 걸려야 갓 하나 나온다.

70년대 이후 방송사나 영화사에 납품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가기 힘들다. 최근의 드라마로는 명성황후, 태양인 이제마, 장희빈 등에서 박씨의 갓이 소품으로 사용됐다. 영화 '스캔들'에서 배용준이 쓰고 나오는 갓도 박씨의 작품이다. 한양원회장을 비롯한 갱정유도회 간부들도 중요 고객이다. 청학동 주민, 유림의 전통이 남아 있는 안동과 전주 등의 종친회 간부들도 가끔 찾아온다.

박씨의 짐은 이제 두 아들이 나눠 지고 있다. 5대째 대물림이 이뤄진 셈이다. 홍익대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큰 아들 형박(炯璞·29)씨는 2001년 문화재청의 전수장학생으로 선발됐다. 박씨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이듬해였다.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둘째 형언(炯彦·27)씨도 직장에 다니는 틈틈이 갓일을 배우고 있다. 박씨는 큰 아들이 가업계승 이야기를 꺼냈을 때 무척 만류했다. 미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갓을 착용할 때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갓의 미학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다. 머리에 얹되 쓴 것 같지 않게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야 하는 것이다. 섬세하게 짜여진 차양 위에 내려 앉는 햇살은 얼굴에 엷은 그림자를 드리워 은은한 멋을 연출한다. 차양이 넓은 갓을 쓰고 좌정한 선비의 모습에선 위엄과 기품이 우러나온다. 개화기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이 선비들의 그런 풍모를 보고 갓을 인류가 고안해낸 모자 가운데 가장 화사하고 멋진 관모라는 평가를 했는지도 모른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 갓의 유래와 종류

조선시대 갓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의관이었다. 유생이나 사대부는 늘 의관을 정제하고 활동했으며 오늘날의 모자와 달리 실내에서도 갓을 착용했다.

성종 때 제주도의 경차관으로 있었던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은 갓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자료다. 부친상의 비보를 접한 최부는 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던 중 폭풍우를 만나 표류를 하게 된다. 돛과 닻이 모두 꺾이고 해적에게 옷과 신발마저 빼앗긴 상황 속에서도 최부는 상갓(喪笠)만은 한시도 벗어놓지 않았다. 오랜 표류 끝에 중국 저장(浙江)성의 한 마을에 닿은 그는 명나라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도 상갓을 벗지 않는다. 그들에게 최부는 "우리 풍속에는 친상을 당하면 3년간 시묘살이를 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는 나의 애끓는 괴로움을 이 상갓으로 달래고 있다"고 말한다.

갓의 형식주의를 비꼬는 글도 전한다. 박지원의 허생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갓 없이 행세할 수 없었던 시대의 허점을 간파한 허생이 갓의 재료인 제주도의 말총을 매점하는 바람에 갓 값이 폭등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갓은 형태적으로는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어려운 방갓(방립·方笠)과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평량자·平凉子)형으로 나뉜다. 방갓형으로는 삿갓 방갓 전모, 패랭이형으로는 패랭이 초립 흑립 전립 주립 백립 등이 있다. 한자로는 흑립(黑笠) 또는 입자(笠子)로 표기되는 갓은 갓싸개의 종류에 따라 진사립 음양사립 음양립 포립 마미립 등으로 나뉘는데 신분에 따라 달리 착용했다. 극상품인 진사립은 왕이나 귀인만 썼다.

갓의 역사는 상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고분 감신총(龕神塚) 벽화에는 패랭이형 갓을 쓴 사냥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관모로 제정되면서 갓은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를 갖게 된다.

갓은 패랭이와 초립의 단계를 거쳐 조선 초 흑립으로 발전한다. 좁은 의미에서 갓은 흑립을 말한다. 1894년 단발령에 따라 중절모가 등장했지만 갓은 여전히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듬해 천인층에게도 갓 착용이 허용되면서 의관제도의 귀천은 제도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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