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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건파일]<8>황해도 수안군 2명의 죽음-당대의 윤리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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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건파일]<8>황해도 수안군 2명의 죽음-당대의 윤리의식

입력
2003.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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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 가셨단다"35세의 정씨 부인은 고향 본가에서 20리나 떨어진 황해도 신계에 출가해 살고 있었다. 그런데 1795년 9월21일 오후 열 살 가량의 아이가 집에 달려와서는 아버지 정완석이 졸지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전했다. 너무 놀란 정부인은 그 길로 친정으로 향했다. 20리는 여자 걸음에 그리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지만 급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에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걸음에 안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버지 정완석은 이불을 덮은 채 죽어 있었고 옆에서 어머니가 울고 있었다. "네 아버지가 동네 사람 이노미한테 맞아 돌아 가셨단다. 청심환도 먹이고 심지어 참기름과 똥물마저 드시도록 했으나 끝내 이렇게 되셨구나."

이 말을 듣자마자 정씨 부인은 방문을 박차고 마당으로 뛰어 나갔다. 이노미는 현재 마을의 상여계(喪輿契) 계장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정완석은 작년의 상여계 계장이었다. 둘이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데다 싸울 일이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런 변고가 발생했을까? 정씨 부인은 이노미를 당장 쳐 죽일 생각으로 밖으로 달려 나가다가 멈칫했다. 마당에는 이미 이노미가 결박돼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인의 동생 정금산과 형부 등이 이노미를 붙잡아 기둥에 묶어 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가?"

이노미의 대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내가 어찌 네 아버지를 죽이려는 마음이 있었겠느냐. 삽선( 扇·상여로 운구할 때 쓰는 일종의 의례도구)으로 무심코 쳤는데 의외로 돌아가신 것뿐이다."

저간의 사정은 이랬다. 9월21일 한동네에 사는 김씨 양반 댁이 초상을 치렀다. 동네 상여계 계원들이 상여를 가지러 마을 창고로 갔더니 크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상여계 전·현 소임(所任)인 이노미와 정완석이 다투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달려갔을 때 이미 정완석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노미는 "상여에 사용되는 죽장(竹杖)이 본래 아홉 개인데 지금 한 개가 없어져서 그 이유를 지난해 계장 정완석에게 물었더니 이미 인수인계가 끝난 일을 가지고 전임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도리어 화를 내는 바람에 서로 욕을 하다가 죽장을 들고 휘두르며 싸우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정완석이 먼저 자신의 엉덩이를 두 차례 가격하므로 화가 나서 정완석의 머리 부위를 몇 차례 때렸더니 그만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도주한 이노미의 부인

이노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씨 부인은 삽선을 찾아 들고 묶여 있는 이노미를 난타하기 시작했다. 결박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노미는 몸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움직이며 맹타를 피했다. 그러자 정씨 부인은 더욱 화가 나서 "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비를 죽여 놓고서 어찌 감히 몽둥이를 피하려 하느냐"고 소리치며 다시 마당에 놓인 새끼줄로 이노미의 목을 감아 마구간 기둥에 세게 묶었다.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이노미는 그저 정씨 부인의 독타(毒打)를 맞고 신음소리를 내며 죽어갔다.

이노미가 죽을 때까지 난타를 그만두지 않던 정씨 부인은 저녁 무렵 아버지의 원수가 죽자 곧바로 읍내 유향소(留鄕所)로 달려갔다. 원수 이노미를 살해했다고 자수할 참이었다.

졸지에 한 마을에서 두 명이 죽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후환이 두려워 슬금슬금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거나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집에 있다가는 사건과 무관해도 일단 잡혀가 매를 맞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사건 발생 후 도주한 사람은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들 뿐이 아니었다. 사망한 이노미의 부인 이씨는 남편이 결박된 채 정완석의 집 마당에 묶여 있는 것을 보고 어찌된 영문인지 물어보고는 그 길로 내뺐다. 그녀는 후일 포교에 붙잡혀 사또 앞에 대령했다. "네 이년, 어찌하여 남편을 사지(死地)에 두고 도망할 수 있느냐?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더냐?"

42세의 이씨 부인은 남의 이불이나 옷가지를 대신 빨아주고 먹을 것을 얻는 것을 호구지책으로 삼고 있었다. 사건 당일에도 빨래를 하고 있는데, 이웃 여자가 와서 소식을 알려주어 남편이 정완석의 집에 결박돼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창황 중에 달려가 보았더니 과연 남편 이노미가 결박돼 꿇어앉아 있었는데 급히 다가가서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남편은 "슬쩍 때린 듯한데 액운(厄運)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 죽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자네가 보고 있어도 이득이 없으니 빨리 멀리 도망가라"고 했다는 진술이었다. 자신이야말로 어리석은 촌부(村婦)인지라 겁을 먹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쳤는데 이틀이 지난 23일 아침 포교에게 붙들려 이렇게 신문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그녀는 모든 일을 죽은 남편의 지시에 따라 한 것 뿐이며 남편이 죽는 광경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고발하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오히려 자신의 시누이가 내막을 잘 알고 있으니 그녀를 신문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수안군수의 보고

정씨 부인을 유배에 처하심이

관련자들을 신문한 후 사망한 정완석과 이노미의 시신을 차례로 검험한 수안군 사또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올렸다.

(증인들의 진술을 보면 정완석과 이노미가 언쟁할 때 정완석이 삽선으로 먼저 이노미의 좌측 엉덩이를 후려치고 이노미 역시 다른 삽선으로 완석의 머리를 맹타하였는데 이때 완석이 즉시 고꾸라졌으므로 정완석이 강하게 맞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노미의 처 이씨 부인의 공초를 보면, 결박된 남편이 "내 이제 죽을 것이니 너 역시 죽을지 모른다. 도망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니 실로 이노미가 그 죄를 스스로 알고 죽기를 기다렸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노미가 정완석을 타살(打殺)한 것이 분명하며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원록'에도 귀 근처는 속사처(速死處)라 하였다. 또한 칠십 난 기운 약한 노인이 급소를 맞았으니 즉시 사망하였음이 분명하다. 실인(實因)은 '피타치사'(被打致死)로 기록한다. 한편, 정 여인의 공초를 보면 2개의 죽장(竹杖)으로 이노미를 난타하였는데 이노미가 좌우로 피하므로 끈으로 목을 기둥에 다시 묶은 후 타살하였다고 하니 이노미의 치명상 역시 '피타'(被打)가 원인이다.

우매한 소견으로는 정 여인이 인명(人命)을 타살(打殺)한 것이 실로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대전통편'(大典通編)의 살옥(殺獄) 조항에 '그 아비가 구타 당해 중상을 입은 경우 아들이 그 사람을 죽일 때는 사형을 면해 유배에 처한다(減死定配)'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아비가 살해된 경우 관의 조사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원수를 마음대로 죽인 경우에도 감사정배(減死定配)한다'고 하였으므로 이제 정 여인은 율문(律文)에 따라 유배함이 마땅할 듯하다.

그리고 이노미의 부인 이씨는 남편을 돌보지 아니하고 도주하였으므로 비록 우매하고 겁을 먹었다고는 하나 윤상(倫常)을 해친 죄가 크므로 그대로 둘 수 없을 듯하다.)

황해도 관찰사의 최종 판결

말리지 않은 동임, 면임들도 벌하라.

보고서는 잘 받아 보았다. 과연 살옥(殺獄)의 죄값은 반드시 정범을 확정한 후에 처리해야 하는 중대한 일이다.

정완석이 맞은 후 금방 사망하였고, 귀 부위가 급소인 데다가 여러 사람의 증언을 참고하면 칠십 노인을 가격한 흉한(兇漢)이 이노미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정씨 부인의 복수는 천리(天理)에 따름이니 형틀을 채우거나 고문하지 말 것이다.

만일 사람을 죽인 자는 역시 죽여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정씨 부인은 법전(法典)에 의거해 특별히 사면하고, 두 구의 시신은 모두 가족에게 내주어 매장하도록 할 것이다. 물론 정씨 부인으로 말하자면 부모의 원수와 한 하늘에 살 수 없다는 의리를 보인 것이지만 범행 당시 이웃들이 마땅히 극구 말리고 사또의 조사를 기다림이 당연한 일이다.

면임(面任), 풍헌(風憲) 등이 금지할 뜻이 없이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었으니 이는 실로 후일의 폐단을 야기할 것이다. 본면(本面)의 면임(面任), 이임(里任)을 모두 이러한 뜻으로 엄히 분부하는 의미에서 각각 결장(決杖) 30도에 처해 후일의 징계로 삼도록 할 것이다.

글 김 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부모를 죽인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이 조선 시대 사람들의 윤리의식이었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복수라면 비록 살인이라도 용서됐다. 다만 공권력(公權力)에 의한 처리를 기다리지 않고 함부로 살인한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하지 아니하고 형을 줄여 유배형을 내렸다.

그런데 정씨 부인처럼 여자의 몸으로 원수를 때려 죽였다면 문제는 달랐다. 이는 효녀나 장부(壯婦)만이 가능한 일이니 더욱 장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하여 정씨 부인은 유배형도 면한 채 '사면(赦免)'을 받게 되었다. 도리어 남편을 죽음에 몰아넣은 채 혼자 도주한 이노미의 부인이 처벌되었으니, 조선 사람들의 인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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