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로맨틱한 영화로 꼽히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릭)가 들창코 돼지라면 어떨까.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1992년 작 '붉은돼지'(Porco Rosso)엔 험프리 보가트 못지않은 로맨틱하고 쿨한 사나이가 나온다.막 붓칠을 한 듯 끝없는 푸른 색으로 펼쳐진 지중해 바닷가에 누워 전축을 틀어놓고 와인 잔을 기울이는 사내의 이름이 바로 포르코 로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 말 이탈리아의 무인도에 홀로 살면서 중고 비행기 한 대로 해적을 소탕하는 상금 사냥꾼이다. 트렌치코트에 검은 색안경을 끼고 늘 시가를 입에 물고 다니며 "좋은 놈들은 다 죽는군", "애국 따윈 인간끼리 많이 하쇼", "파시스트보다는 돼지가 낫지"라는 등 릭 못지않은 냉소적인 말을 툭툭 뱉는다. 적을 쓰러뜨리더라도 죽이지는 않는 휴머니스트의 면모도 있다. 이런 그의 모습에 모든 여자들은 열광적 지지를 보낸다. 그런데 그는 인간이 아니다. 전직 공군 대위였던 그는 전쟁에 지친 나머지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되었다.
놀라운 비행술과 상대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공격력 덕분에 포르코 로소에겐 적수가 없다. 해적들은 포르코에 맞서기 위해 미국인 비행기 조종사 커티스를 용병으로 데려온다. 커티스와의 첫번째 대결에서 비행기가 부서진 포르코 로소는 비행기 수리를 맡겼다가 피오라는 소녀를 만난다.
마법에 걸려 개구리가 된 왕자 같기도 하고, 그리스 신화에서 키르케의 노랫소리에 홀려 돼지로 변한 선원 같기도 한 포르코 로소에겐 로맨티스트 특유의 아우라가 있다.
로리타 같은 피오에게도, 샹송을 잘 부르는 고혹적인 여인 지나에게도 선뜻 마음을 주지 않고 쿨하게 자기 길을 걷는 포르코 로소는 매력과 외모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19일 개봉.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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