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은 봉준호(34) 감독의 해였다. 두 번째 작품 '살인의 추억'으로 510만 명의 관객을 모아 최고의 흥행 성적을 낸 것은 물론 각종 상까지 휩쓸었다. 도쿄영화제 아시아영화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작품상·감독상, 토리노영화제 각본상·관객상,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영화제 최우수 감독상 등 수상 내역이 빽빽하다. 앞으로 받게 될 상을 더하면 목록은 배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평론가가 준 상이 가장 기쁘다
그 많은 상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누가 떠올랐을까. "같이 작업한 스태프다. 여유가 나면 아내와 아기가 생각나지만." 가장 기뻤던 상은 의외로 영화평론가협회가 주는 영평상이었다. "늘 평론가들이 무서웠다. 흥행에 기를 쓴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분들 반응이 썰렁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해외에선 산세바스티안영화제였다. 전작 '플란더스의 개'를 들고 갔을 때는 구경만 했는데…." 봉 감독은 너무 많은 상을 받아 민망하다고 했다. "'살인의 추억'을 빨리 잊고 싶다. 세 번째 영화에 집중하고 싶다. 영화를 계속 찍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다."
차기 작 시나리오를 제작사 청어람이 마련해 준 마포의 오피스텔에서 쓰고 있다. 시작한 지 얼마 안돼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급작스러운 재앙의 이야기"라는 것 외에는 스스로도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삼인삼색'에서 가짜 다큐멘터리 준비중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한 사람이라면 전주국제영화제 특별프로젝트 '디지털 삼인삼색'에서 그가 들고 나올 '모자이크 다큐멘터리: 인간 조혁래'가 기다려질 법하다. 30분짜리 디지털 단편영화 세편을 묶어 상영하는 이번 프로젝트엔 홍콩의 유릭와이(37), 일본의 이시이 소고(47) 감독이 함께 참여한다.
"가짜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에 관심이 있었는데 마침 전주에서 제안이 왔다. 우리의 일생이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은행과 지하철 CCTV, 결혼식장 비디오에 촬영되고 저장된다. 심지어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도 포착된다. 그 차가운 시선에 담긴 파편을 긁어 모아도 연대기가 구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서서히 망가져가는 사람 이야기를 그렇게 그릴 생각이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 민노당을 지지할 뿐
그는 올 한 해를 "두 번째 영화를 개봉하고 세 번째 영화를 준비한 해"로 짧게 정리했다. "'살인…'은 제작비나 잘 회수했으면 했다. 범인도 안 잡히는 비관적 얘기를 두 시간 넘게 한다고 하니 모두들 잘 안 될 거라고 했지만 (예상과 달리 성공을 거둔 것은) 실제 사건의 파괴력이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심정은 복잡하다. 피해자 '향숙이'가 농담거리가 되는 걸 보고 무척 부담이 됐다. 두 번 다시 실화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최근 민주노동당 당원임이 밝혀져 화제가 됐지만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지할 뿐이며 영화는 나름대로의 영화적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 영화가 좋다"고 했다. 함께 해보고 싶은 배우는 김혜자씨. "(전형적인) 어머니상에 감춰진 이상하고 독특한 면을 끌어내면 폭발력 있는 에너지가 나올 것 같다."
연세대 재학 시절 대학신문에 카툰을 그렸을 정도로 재주꾼이지만('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을 쓴 박태원이 외조부다) 영화를 만들고 보는 일 말고는 '가장 친한 친구'인 초등학교 1학년 아들과 노는 것이 낙이다.
인터뷰를 서둘러 마쳐야 했다.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가 주는 올해의 최우수예술인상을 받으러 훤칠한 키의 봉 감독이 휘적휘적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종도기자 ec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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