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크 빵 떡 밥 쵸코릿 피자 같은 음식을 정말 창자가 부어오를 때까지 먹지요. 억지로 뱃속에 음식물을 집어넣다 보면, 나중엔 맛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돼요. 그 다음엔 구토하죠, 식도가 찢어져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로 뱃속에 들어간 것들을 모조리 토해내죠." "갑자기 허기지다 생각되면 눈 앞에 여러 음식만 떠올라요. 카페에서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집안에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둘러대곤 허둥지둥 귀가하죠. 그리고 닥치는 대로 먹어댑니다. 어느 날엔 먹을게 없어 부엌에 있던 식초 한 병을 다 들이켰던 일도 있어요." "왜 미련스럽게 폭식하느냐구요? 먹어야 구토할 수 있으니까요."한 식사장애 클리닉에서 만난 여성들과의 인터뷰에서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원래 목적은 무시되고, 음식은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용되는 반복적 수단일 뿐이었다. 음식은 그들에게 휴식처였다.
먹을게 부족했던 시절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던 식사장애. 풍요로운 세상이 만들어 낸 의지가 박약한 여성에게 나타나는 한가로운 병이라고 단순히 접근하기엔 폭식증 거식증 여성들이 자살을 시도했다 남긴 손목이나 손등의 칼자국들은 너무 선명하고 끔찍했다. 한 여성환자는 "식사장애는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말했다.
왜 여성에게 많을까
식사장애는 남녀 환자 비율이 10대 1정도로 여성에게 압도적으로 많다. 거식증과 폭식증의 비율은 폭식증이 2∼4배정도 더 많다. 미국 통계에 따르면 전체 여성가운데 약 0.5∼3.7%가 신경성 식욕부진증(거식증)을, 1.1∼4.2%가 대식증(폭식증)을 겪고 있다.
'나눔클리닉' 이영호 원장은 식사장애가 여성에게 많은 이유는 "외모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우리사회가 여성에 대해 가지는 문화적 차이"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성적인 대상으로만 평가되기 때문에, 젊음과 아름다움에 최고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미(美)를 추구하는 것이 여성에게 의무이자 사회적 강박이 되면서, 이전에 가졌던 전통적인 여성역할에 남성과 경쟁하며 얻게 되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이 부가되면서 겪게 되는 혼돈이 여성에게 식사장애라는 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일부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식사장애는 남녀차별이 빚어낸 현상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또 이 원장은 "비록 이론적 수준이지만, 음식 섭취를 조절하는 세로토닌의 반응성 차이, 남녀간의 뇌발달 차이등과 같은 생물학적 요인이 거론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연구에 따르면 폭식증이나 거식증을 겪고 있는 환자의 경우 세로토닌이나 에피네프린 같은 물질은 눈에 띄게 감소하고, 바소프레신이나 코티졸의 수치는 올라갔다는 것. 특히 세로토닌은 우울증을 겪는 환자에게도 비정상적으로 감소하는 신경전달물질이어서, 일부 학자들은 우울증과 식이장애의 관련성에 대해 집중연구 중이다. 1991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식사장애 클리닉 '마음과 마음'을 개원했던 김준기 원장은 "집안에 우울증이나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는 가족이 있는 여성이 다이어트에 집착할 경우 다이어트 장애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경험이나 환경도 큰 영향을 미친다. 김원장은 "어린시절 주위 몸이 비만해 사람들로부터 받은 '뚱보'라는 놀림은 자기 신체에 대한 불만족감을 심어주게 되고,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신체를 미워하게 되는 심한 열등감 속에서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극단적인 식사장애를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또 어린시절 성적학대나 신체학대를 받았던 경우 자신의 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극단적으로 몸을 마르게 하여 여성다움을 스스로 없애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또 가족의 지나친 과보호나 무관심에서 성장한 여성들은 부모에게 매우 의존적이면서도 한편으론 독립하고픈 갈망이라는 양가(兩價)감정에서 끊임없이 절망을 겪으면서 스스로 이런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인 식사장애를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김원장은 "식사장애는 유전적 사회적 심리학적 요인이 얽혀 일어나는 복잡한 병으로, 결코 개인의 의지만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살빼기와 식사장애는 다른가
거식증 폭식증 환자가 겪는 증세가 다이어트장애이기는 하지만,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이 모두 거식증 폭식증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이영호 원장은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은 체중이나 외모의 변화가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하지 않는데 비해, 식사장애를 가진 여성에게는 체중이나 외모가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된다"고 말했다. 몸이 0.5㎏ 불었을 때 다이어트중인 여성은 실망하고 기분은 상하지만 살은 다시 빼면 되는 것이라 여기고, 자신의 일상생활에 계속 몰두할 수 있지만 식사장애를 가진 여성은 체중이 원하는 데로 돌아오지 않으면 자신이 무능력자라고 여겨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김원장은 "식사장애(거식증) 여성은 체질량지수가 17.5(정상인 18∼23)이하의 저체중에 도달해도 늘 살이 찌는 것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이 있고 끝없이 마르고 싶어하며, 심하게 말라 올 수도 있는 건강상 위험을 부정한다"면서 "3개월이상 지속적인 무월경증이 나타나야 하는 것도 중요한 진단기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키 165㎝에 47㎏의 날씬한 몸을 갖고서도 식사장애 환자들은 살이 찌는 것에 대해 늘 두려움을 나타낸다.
이원장은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은 다이어트나 체중조절의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생각, 심한 다이어트를 너무 쉽게 하고 있다"면서 "극심한 다이어트는 식사장애 발생과 관련있다는 보고도 있다"면서 무분별한 살빼기에 우려를 나타냈다.
식사장애 어떻게 벗어나나
김원장은 "우리나라에선 식사장애에 대한 인식이 낮아 만성병으로 익힌 후에야 병원을 찾는다" 면서 "진행성 장애이기 때문에 병이 오래되면 될수록 치료도 복잡해지고 길어진다"고 말했다. 특히 폭식이나 멈추게 하려고 단식원이나 비만클리닉을 찾는 경우가 많은데, 금식기간동안 일시적으로 폭식이 줄어들기는 하지만 결국 금식으로 인한 기아상태가 더욱 심한 폭식을 유발하기 때문에 적절한 치료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식사장애는 단순한 식사행동의 장애가 아니고 깊은 마음의 문제가 동반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러가지 치료기법이 동시에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문클리닉에서는 환자들에게 정신치료 약물치료 영양상담 인지행동치료 가족 치료 등을 복합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또 하루 종일 집에서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는 경우, 언제 쓰러질지도 모를 정도로 영양결핍이 심한 상태일 때 우울증이 심해 자살의 위험성이 있을 때, 심한 환자에게는 입원치료도 권하고 있다.
김원장은 "사실 단시일내 만족할만한 효과를 보기 어려워 의사로서도 때때로 좌절할 때가 많다"면서 "그러나 꾸준한 노력과 의지로 병을 이겨내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말했다.
yjsong@hk.co.kr
■스스로를 사랑할수 있게 부모의 정서적 지지 중요
만성화된 거식증 폭식증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질병이다. 왜 수년동안 먹고 토하고를 반복하면서, 오로지 다이어트에만 집착하는지 같이 사는 가족 입장에서는 더욱더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대부분 부모는 딸이 한없이 불쌍하기도 했다가 또 갑자기 병 같지도 않은 병에 걸린 것 같아 한심하게 보이기도 하는 복잡한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식사장애에 대한 부모의 올바른 이해와 그를 바탕으로 한 정서적 지지는 이 병의 예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거식증 폭식증은 흔히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이 병의 이면에는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자신에 대한 무가치감, 병적인 수치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부모들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그러한 정서적 어려움을 천천히 극복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아갈 때 거식과 폭식의 증상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식이장애에 걸린 자녀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게 되고, 또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어떻게 해서든 이 병에서 벗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부모이다.
/김준기 마음과 마음 클리닉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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