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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81>力道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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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81>力道山

입력
2003.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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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15일 프로레슬러 역도산이 도쿄(東京)의 한 병원에서 복막염으로 숨졌다. 38세였다. 그는 그 일주일 전인 12월8일 뉴라틴쿼터라는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다 한 일본 청년의 칼에 옆구리를 찔렸다. 역도산의 본명은 김광호(金光浩)다. 김신락(金信洛)으로도 불렸다. 함남 홍원 출신. 본디 씨름 선수였던 그는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모모타(百田)로 개성(改姓)하고 스모(相撲: 일본씨름)계에 뛰어들었다. 그가 '역도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리키시(力士: 스모 선수)로서다.역도산의 스모 인생은 비교적 순탄해 그는 리키시의 제3계급인 세키와케(關脇)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그러나 제2계급인 오제키(大關) 진급을 눈앞에 두고 슬럼프에 빠진 뒤 결국 스모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뛰어든 것이 프로레슬링이었다. 그 시절 프로레슬링은 일본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역도산은 미국 전지 훈련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일본으로 돌아온 뒤 선수 겸 프러모터로서 외국의 유명한 선수들을 불러들여 직접 시합을 가졌다. 그가 가라테촙을 휘두르며 동양 타이틀, 세계 타이틀을 따는 동안 프로레슬링은 일본 최고의 흥행 스포츠가 되었고, 덩치 큰 미국 프로레슬러들을 잇따라 때려눕히는 역도산이라는 사나이는 그가 조선 출신임을 모르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에게 패전의 아픔을 씻어주는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의 문하에서 김일(金一),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안트 바바 같은 스타들이 나왔다.

프로레슬링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전반까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프로레슬링은 순수 스포츠라기보다 관중들에게 보이기 위한 일종의 스펙터클쇼다. 그래서 프로레슬러에게는 경기력만이 아니라 연기력도 필요하다. 역도산이나 김일은 뛰어난 경기자이자 연기자였던 셈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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