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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16> "그 여자 사람잡네" 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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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16> "그 여자 사람잡네" 돌풍

입력
2003.1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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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이 흥행에 성공하려면 어떤 요소가 필요할까. 좋은 작품, 좋은 배우와 연출자, 또 이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예리하고 지적인 관객들. 정답에 하나를 더하라면 난 연극 제목을 꼽겠다. 공연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 들어도 여전히 입맛 당기는 연극 제목이 있다. 이런 제목을 지닌 연극들은 예외 없이 흥행에 성공한다. 75년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극단 자유가 공연한 '그 여자 사람잡네'가 좋은 예이다.로벨 토마의 원작으로 추리적 요소와 연극적 재미가 완벽하게 결합된 이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 데는 제목의 공도 있었다. 원작의 제목을 있는 그대로 옮기면 '낯선 여인의 함정'이었는데 초연 때는 '프로랑스는 어디에'라는 이름을 달고 공연했다. 재미있는 내용에 비해 제목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극단에서는 다시 무대에 올릴 때는 새 제목을 붙이기로 했다. 그 결과 '그 여자 사람잡네'라는, 지금 들어도 무슨 일이 생겼을까 궁금증을 유발하는 제목이 탄생했다. 내가 '그 여자'란 문구를 떠올리자 이병복 선생이 거기에 '사람잡네'를 보태셨다.

제목이 정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연을 연습하던 여름은 유난히 더워서 20평 남짓한 연습장은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조역이나 노역을 주로 맡던 나는 '그 여자 사람잡네'에서 모처럼 아름다운 여형사 '프로랑스' 역을 맡았다. 프로랑스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나는 여간 신경을 쓴 게 아니었다. 손수 그녀가 입을 옷을 디자인하고 속옷, 스타킹, 구두, 가방에 이르는 소품을 일일이 챙겼다. 그 덕분인지 막이 오르자마자 극장이 미어 터졌다.

명동의 엘칸토 예술극장으로 옮겨 연장 공연에 돌입했다. 당시로서는 유례 없는 장기 공연이었다. 세상에 월요일도 쉬지 않고 36일 간 매일 하루에 두 번씩 공연을 하다니 미친 짓이었다.

결국 일은 터지고 말았다. 공연 도중에 배우 장건일이 탈진해 응급실에 실려가는 사고가 생겼다. 그뿐이랴. 힘든 공연을 억척스럽게 잘도 견딘다 싶어 스스로가 대견스러웠을 때였다. 갑자기 내 허리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척추에 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살인적 공연이 끝나자마자 나는 드러누웠고 어머니가 마련해 주신 흑염소탕을 먹은 지 두 달 만에야 겨우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제목 그대로 "그 여자 사람잡네"였다.

어쨌든 '그 여자 사람잡네'가 관객 몰이에 성공하면서 모처럼 큰 액수의 개런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돈은 고스란히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자동차를 사는 데 들어갔다. 나는 내 전리품, 자동차 값의 절반이나 되는 개런티를 모두 그에게 주었다. 당시 광고회사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그에게 자동차를 갖는 건 별나라, 꿈나라의 일이었다. 내 덕에 우리 집 앞마당에는 국산 승용차 1호인 '포니 1'이 멋진 자태를 드러낸 거다! '나도이제 자가용 신나게 얻어 타겠네'라며 좋아했다. 그런데 웬걸, 마이카 시대는 나와는 무관했다. 남편은 나 아니었으면 굴리지도 못했을 자동차에 나를 태워주지 않았다. 치사한 생각이 들어 타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약이 바싹 올랐다. 실망, 배신감, 분통 따위의 울화와 관계된 감정으로 내 가슴 속은 미로처럼 복잡해졌다.

그 후 10년이 지난 뒤 남편은 내게 자동차를 사주겠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그 동안 아내, 엄마 노릇으로 수고했으니 그 상이라고. 말 되는 소리였다. 나는 재빨리 운전면허를 땄다. 기계치인 내가 그렇게 빨리 면허를 딸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황금빛 엑셀을 선물 받았다. '그 여자 사람잡네'는 하마터면 '그 남편 사람잡네'라는 전혀 다른 카피로 내게 기억 될 뻔한, 웃지 못할 사연을 남긴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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