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2시 서울지법 309호 법정. 재판부가 들어오기 몇 분 전, 피고인석에 자리를 잡은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후 선고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법정내 그 누구보다 가장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결심 공판에서 검찰이 징역 20년을 구형하자 눈물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재판부가 유죄 판결의 취지를 설명한 뒤 최종 징역 12년을 선고하기 직전 "판결문에 자세히 썼으니, 항소심에서 적절히 대응하기 바란다"고 말을 건네자 박씨는 긴장하는 방청객들과 달리 "네"하며 정중한 목소리로 응수하기도 했다.
박씨와는 대조적으로 박씨 변호인은 공판이 시작되자마자 전날 불거진 '2000년 4월14일 연극관람 사진 알리바이'를 주장하며, 재판부에 변론 재개를 강력히 요청했다.
이에 재판부는 변호인으로부터 사진을 건네받아 본 뒤 "150억원을 마련했던 현대상선 임직원 한 명만 '돈을 준 것이 총선(4월 13일) 이후'라고 말했을 뿐, 아무도 돈 준 시점을 4월14일로 확정하지 않았다"며 "더구나 그 임직원 조차 말미에 '확실하지 않다'고 덧붙였다"고 변호인측 주장을 일축했다. 재판부는 또 "검찰이 제출한 문화관광부 전 문화예술과장의 진술서, 4월30일에 연극관람을 하고 사진촬영, 기부를 했다는 문화관광부 일정자료 등을 볼 때 사진이 변호인 주장대로 4월14일에 촬영된 것이라는 입증도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판부는 "이 사건의 본질은 '4월14일의 알리바이'보다, 관련자들의 진술에 어느 정도 신빙성과 증거능력을 부여할 수 있느냐에 있다"며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과 김영완씨의 진술 등을 받아들인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는 일단 김씨가 정몽헌 회장에게 돈을 요구하고, 정 회장 지시로 김재수 전 현대건설 부사장이 현대상선에 150억원을 마련토록 한 것, 이 돈이 이익치씨에게 건네지고 다시 그 돈을 김영완씨가 보관·세탁한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쟁점은 과연 피고인이 현대에게 돈을 요구하도록 김씨에게 지시하고, 피고인이 실제 이씨로부터 돈을 받아 김씨에게 보관토록 했는지 여부인데, 관련자들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돈 전달 장소인 프라자호텔 주차 과정에 대한 이씨 진술에 일관성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 "이씨는 '주변 공사장을 지나 주차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고, 사실조회 결과 2000년 4월 프라자 호텔 주변에 실제 공사가 있었다"고 지적하는 등 변호인측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30여분 동안의 공판이 끝나자 변호인들은 "납득할 수 없다"고 했지만, 박씨는 법정을 나가는 재판부에 인사를 하고 주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는 등 재판부가 내놓은 '실체적 진실'을 수용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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