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지음 창비 발행·8,500원
"시방 요 관광뻐쓰에 타고 있는 우리 동창들만 허드라도 저마다 다 심들고 에룹게, 그러면서도 열심히 자기 인생 자기가 손수 운전허고 살어온 친구들이여. 그렇기 땜시 일고야닯 정도는 자기 인생이야말로 진짜 대하소설 감이다, 외려 소설보담도 더 극적인 드라마다, 허고들 자부허는 축이지." 환갑을 앞둔 초등학교 동기생 40여 명이 관광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간다. '서울 것들 틈새에 주녁이 들어 맥을 못 추던 사투리란 놈이 느닷없이 벌떡벌떡 일어나 목구녁 배깥으로 질펀하니 쏟아져 나오는', 전북 이리 토박이말 잔치판이다. 윤흥길(61)씨의 연작소설집 '소라단 가는 길'의 첫 작품 '귀향길'이다.
모교 운동장에 모깃불을 만들어 놓고 모여앉아 손수건 돌리기 하듯 이야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소라단 근처 보육원의 원생이었던 박충서는 피난길에 잃은 큰누님이 서울에 있는 것을 알았다며 겨우내 기차삯을 벌었다. 고생고생해서 서울에 갔는데 철석같이 큰누님으로 믿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생판 모르는 여자였다.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던 아이가 겁 많은 강아지처럼 구석진 자리로만 배돌았다. 세월이 훌쩍 지나 한데 모인 친구들은 옛 급우의 상처를 뒤돌아보고는, '그렇고 그런 범부들이 보통 가정에서 누리는 고만고만한 기쁨이 가장 생광스런 복이라는 사실을 서로서로 재확인하는 눈치였다.'('소라단 가는 길')
'황새' 유만재가 기억 속의 6·25를 만나러 가는 '묘지 근처' 얘기는 무섭고 또 쓸쓸하다. 어렸을 적 꼬마는 밤마다 저승사자로부터 할머니를 지켜야 했다. 전쟁에서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저승사자를 따라갈 수 없다며 이를 악물었던 할머니는, "우리 병권이 대신 차라리 이 늙은이를 델꼬 가란 말여!"라며 '담판'에 나섰다. 할머니가 숨을 거두고 병권이 삼촌이 온 그해 봄이 어른이 된 유만재에게는 지금껏 반갑고 두려운 감정으로 남아 있다. 대학교수가 된 김지겸은 '농림핵교 방죽' 얘기를 들려준다. 하교길에 미군 트럭을 쫓아가며 "할로 기부 미 쪼꼴레뜨, 오케이!"를 외쳐대고, 흑인병사가 던져주는 치즈 한 덩이에 뿌듯하게 기뻐하던 때였다. 갓 부임한 젊은 선생님은 전쟁하듯 피흘리며 덤비는 아이들의 싸움에 눈물을 흘렸다. 방죽으로 떠밀려온 혼혈아기 시체에 돌멩이를 집어던지는 아이들을 보고, 선생님은 울면서 아이들을 후려갈겼다.
전쟁통에 어린 심성은 그렇게 닳아져 버렸다. 윤흥길씨가 마음 속 감옥에 가둬놓았던 기억들이다. 그 체험은 작가의 문학적 출발점이자 대표작인 중편 '장마'(1973)와 맞닿아 있다. 시간을 훌쩍 넘어 시작한 자리로 돌아와 작가는 '이야기 돌리기'를 한다. 상처에서 분(憤)과 눈물은 걷혔지만, 오히려 붉은 빛은 더 선명하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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