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 여의도 공원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1만 여명의 주민이 참가한 집회가 열렸다. 그러나 '지방살리기 3대 특별법 입법제정 촉구 국민대회'라는 절박한 이름의 이 집회는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중앙언론에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며칠 뒤 이 집회를 주최한 시민 단체인 지방분권국민운동은 날이 잔뜩 선 성명을 발표했다. "무슨 권리로 지방의 목소리, 지방 여론을 이렇듯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언론종사자 입장에서 속이 뜨끔했다. 그들의 분노는 오랫동안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울 중심, 수도권 중심의 생각에 오랫동안 젖어왔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낸다'는 속담대로 뭔가 번듯한 직업이라도 얻어 보려고 기를 쓰고 서울로 향했던 우리들이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와 일가를 이룬 이들에게 이제 시골은 아련한 향수의 대상일 뿐이다.
경부고속철에 오송, 김천·구미, 울산역 등 3개역을 추가신설 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자 중앙에서는 한결같이 '저속철'로 전락할 것이라며 아우성쳤다. 추가역 신설로 늘어나는 시간은 15분 안팎에 불과하며, 수혜인구가 무려 260만 명 늘어난다는 항변은 가려졌다. 해당 지역에서 "드디어 숙원이 풀렸다"며 잔치를 벌이고 환영했다는 얘기도 묻혔다. 가뜩이나 어려운 지역경제가 살아나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주민들의 소박한 기대는 지역이기주의로 패대기 쳐졌다.
정부가 새 후보지 선정을 시사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부안 사태는 어떤가. 원전수거물 관리시설 반대를 외쳐온 주민들의 시위는 5개월이나 계속됐다. 그동안 중경상을 입은 주민은 500여명에 달하고, 사법처리 된 주민도 100명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를 비롯해 서울 중심의 사고에 젖어있는 세력들은 보상을 좀 더 받기 위한 지역 주민들의 투정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급기야 지난달 중순 정부가 주민투표 연내 실시를 거부한 데 반발, 주민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한 시위가 있은 후에야 뒤늦게 호들갑을 떨었다. 부안을 줄지어 방문한 정치권 인사들은 "그동안 뭣하다가 이제서야 오느냐"는 핀잔과 "총선이 다가오니까 찾아오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부안 주민들의 몸부림을 폭력적 지역이기주의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그러한 시설을 자기 동네에 설치하는 것을 쌍수를 들고 반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소외된 시골 사람들의 반란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새 행정수도 건설을 둘러싼 지금의 논란도 그렇다. 수도 이전 문제가 제기됐던 것은 수도권 집중현상의 폐해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괴물이 전국의 인적, 물적자원을 빨아들임으로써 나타난 갖가지 문제, 주택난, 교통난, 교육문제, 환경오염 등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행정수도 이전이 제기된 근본원인은 제쳐놓고 이전비용이라는 다분히 과대포장된 논쟁에만 집착해 있는 꼴이다. 이는 일정 부분 정치권을 비롯한 기득권층의 서울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과거 정부도 나름대로 지방분권 내지는 지방 분산을 위한 정책을 시행해 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우리는 아직도 '서울 도그마'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
이 충 재 사회2부장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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