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 신혼 생활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말하겠다. 뒤죽박죽이었다고. 노처녀 신접 살림을 굳이 보자며 방송국 동료들이 몰려든 날, 나는 인스턴트 수프와 롤 케이크로 손님 대접을 했다. 지금도 나는 손댈 수 없을 만큼 요리에 백치지만 그땐 엄두도, 주변 머리도 없었다. 심플하게 차려야겠다고 생각하자, 떡 벌어진 상에 둘러앉아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데 기와 묘를 다하느라 정작 다감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는 그런 정경이 못 견디게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고집은 서리처럼 차가운 반응을 부르고야 말았다.왜 그렇게 화난 얼굴들이었을까. 그토록 싸늘하게? 때마침 겨울이었으니 친정에서 담가준 김장 김치로 돼지고기 듬성듬성 썰어넣고 김치찌개 부글부글 끓여 대접했다면 그들이 그렇게까지 불행한 표정은 짓지 않았을 텐데. 며칠 후 나는 그렇게 인색한 대접은 처음 받아 봤다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러고 보면 놀부에 스크루지를 합친 구두쇠가 되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집들이에 왔다가 롤 케이크를 대접 받은 고은정, 전은숙 선배는 두고두고 씹던 껌을 다시 또 씹듯 그 이야기를 꺼냈다. 하기야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도 했다.
다음은 동창들 차례였다. 지난번 집들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은 나는 이번에는 동태찌개를 끓이고 꽁치를 구웠다. 그리고 요리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콩나물 무침을 했다. 친구들은 모두 배가 고파 난리들이었다. 서둘러 전기 밥솥에 쌀을 앉히고 코드를 꼽았다. 친구가 일본에서 사다 준, 당시로서는 귀하기 그지 없는 도시바 전기 밥솥이었다. 밥상을 지켜보며 안타깝게 허기를 달래고 있는데 스위치가 튀어 올랐다.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러나 뚜껑을 열었을 때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생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 밥솥은 수증기를 이용하기 때문에 쌀 그릇 밑으로 물을 부어야 했다. 기계치인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다. 모두 비참한 얼굴이 됐고 난민이 따로 없었다. 다시 쌀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상 위의 반찬이 모두 사라지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신혼 시절 남편의 월급은 점심 몇 번이면 바닥이 나버리는 박봉이었다. 나는 매일 남편 도시락을 사랑으로 쌌다. 성의로 먹어주지 않는 한 맛있을 리 없는 도시락이었지만 고맙게도 남편은 그 도시락을 전리품처럼 기꺼워하며 들고 나가 주었다. 그러나 내가 만든 도시락이 남편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날 퇴근한 남편은 빈 도시락을 내 놓으며 말했다. "반찬이 짜다. 싱겁게 해라." 나는 언제나 나중에 이해를 한다. 그 순간엔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고 설거지를 하고 있자니 때늦은 굴욕감이 수증기처럼 피어 올랐다.
"내가 자기네 집 밥하는 사람이야? 반찬이 짜건 싱겁건, 맛있건 없건 주면 주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먹지. 해주는 것만 해도 어디야? 언감생심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화가 난 나는 며칠 동안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 본때를 보이겠다는 심산치고는 머리도 나빴고 치졸했지만, 그는 티끌만큼의 타격조차 받은 것 같지 않아 오히려 더 나를 약 오르게 했다. 젠장, 맛도 없는 도시락에서 해방되었다고 좋아하기만 했겠지.
17평 아파트 부엌에서 시작된 나의 아내, 주부 역할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 지지 않았다. 아파트가 '인형의 집'도 아니고, 내가 목청 큰 '노라'도 아니었지만 그 역할이 왜 그토록 생경했을까. 배추김치를 썰면서도, 밥을 다 푸고 난 뒤 주걱에 묻은 밥알을 긁으면서도, 남편의 양말을 빨면서도 나는 타협할 수 없는 내 낯선 배역에 저항하고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난 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처량하게 쭈그리고 앉아 마루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뒤통수를 쳤다. "올해 가장 인상에 남는 좋은 연극무대를 우리에게 선사해 준 박정자씨는 지금 한창 달콤한 신혼생활에 빠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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