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오늘]<977>鄭伊衡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오늘]<977>鄭伊衡

입력
2003.12.10 00:00
0 0

1956년 12월10일 독립운동가 정이형이 59세로 작고했다. 정이형은 평북 의주 출신이다. 호는 쌍공(雙公). 정이형이라는 이름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은 해방 이후의 뒤틀린 역사와 관련 있을 것이다. 일제 협력자들이 권력 투쟁의 마당에서만이 아니라 여론 투쟁의 마당에서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탓에, 해방의 밑거름이 된 수많은 전사들의 행적과 이름은 역사의 응달에 머물러 있다.정이형의 항일 운동은 당초 민족교육 운동에서 시작했으나, 이내 무장투쟁으로 승화했다. 그가 무장투쟁의 둥지로 삼은 단체는 대한통의부와 그 후신인 정의부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정이형은 중국 동북지방과 조선 북부지방을 넘나들며 일경의 파출소와 주재소를 연이어 습격해 그 지역 일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정의부의 민족유일당 운동을 통해 1926년 국내외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망라하는 고려혁명당이 만주 지린성(吉林省)에서 결성됐을 때 그 중심에 서있던 사람도 정이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듬해 하얼빈(哈爾濱)에서 일경에 체포돼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식민지 법정은 정이형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그는 평양형무소,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대전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18년 5개월 17일간의 옥살이였다.

해방기 정이형의 활동으로 특기할 만한 일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의 초안 마련을 주도한 것이다. 미군정의 동맹 세력인 친일 경찰과 관료를 겨누고 있는 이 법안이 군정장관 러치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러치는 입법의원을 통과한 이 법의 인준을 결국 보류함으로써 제 정치적 파트너들을 구해냈다. 그러나 이 사산된 법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으로 되살아나 잠시나마 친일 분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