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젊은 팬으로부터 러브 레터를 받았다. 그것도 'PAPER'라는 잡지에 공개적으로. 세상에 어찌나 가슴이 떨리던지. 육십이 넘은 나이에 무슨 러브 레터냐고, 주책이라고 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랑에 가슴 설레는 건 어찌할 수 없으니, 이걸 어째.앞 문장을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가 뭐 연애 꽤나 한 줄 알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도 못했다. 처녀 시절 동아방송 성우로서 방송하랴, 극단 '자유'의 단원으로 연극하랴, 바쁜 나날을 보낸 대가였다. 아무리 그래도 연애 한 번 못해 봤겠느냐고 지레 짐작하시는 분들을 위해 딱 하나 기억이 나는 연애담을 풀어놓기로 한다.
동아방송 성우 1기로 같이 입사했던 사람 중에 J씨가 있었다. 카톨릭 의대에 다니면서 가수로도 활동하던 사람이었다. J는 당시 최고의 인기 그룹으로 '빨간 마후라'를 부른 쟈니 브라더스의 네 남자 중 하나였다.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결혼 이야기까지 나왔던 그와 헤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노래를 한다는 게 슬퍼 보여서였다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분명 그 때문에 우리는 헤어졌다. 어느날 워커힐호텔에 쟈니 브라더스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조명실에 앉아서 그가 노래 부르는 걸 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있는데 그는 그들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다니. 결국 어느날 나는 다방에서 펑펑 울면서 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고야 말았다.
그 후 서른 살 노처녀가 됐을 때 결국 앞서 얘기한 군부대 위문공연을 통해 이 소위를 만났다. 위문 공연을 두 번째로 갔을 때는 한 겨울이었다. 더구나 연극을 연병장 단상에서 했으니 오죽이나 추웠을까. 연극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 소위는 몸이 꽁꽁 얼어 떨고 있던 나를 보고는 자신의 방한모를 씌워줬다. 마음까지 따뜻해진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그때 이 소위, 이지송씨와 결혼까지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오히려 같은 부대에 있던 한 소령이란 사람이 나를 죽어라고 쫓아 다녔다. 그런데 참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는 게 그 한 소령과 명동에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마침 휴가 나온 이 소위와 딱 마주친 거였다. 그때 이지송씨는 가죽 점퍼 안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참 추워보였다. 그래서 따뜻한 셔츠 하나를 선물했는데 그게 사랑일 줄이야.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이 소위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며 데이트를 하던 때도 결혼은 여전히 먼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나를 택시에 태우고는 자기 집으로 끌고 갔다. 그저 부모님께 인사 드리러 가는 줄 알았는데 이게 웬걸. 그는 대뜸 나와 결혼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해버렸다. 어머니는 네 살이나 많은 나와 결혼하는 게 못마땅하셨지만 한 번 한다면 기어이 하고야 마는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계셨다.
오히려 우리 집안의 반대가 더 심했다. 아니 이 표현으로는 부족하겠다. 내가 오빠에 이어 연극을 한다고 나설 때도 별 말이 없으시던 어머니가 그 때만큼은 마음을 풀지 않으셨으니. 그도 그럴 것이 삼십 넘은 노처녀가 어찌 어찌하여 네 살이나 어린 남자를 골라 어느날 갑자기 시집을 가겠다고 하니 식구들이 놀랄 수밖에. 그 무렵 어머니는 나 때문에 서너 번 보따리를 싸셨다. 반면 친구들은 까짓 여태 시집도 못 가고 있던 노처녀, 소도둑이라도 데려가기만 하겠다면 얼른 내주시지 뭘 그러냐고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런데 장애물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그의 직업. 홍대 미대를 졸업한 남편은 당시 인테리어 사업을 막 시작한 상태였다. 어머니는 나이도 나이지만 불안정해 보이는 남편의 직업에 불만이 더 크셨다.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는 인테리어 사업을 접고 광고 회사에 취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진통 끝에 우리는 72년 11월24일 결혼했다. 벌써 서른 한 해가 지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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