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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12> 동춘 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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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12> 동춘 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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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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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엘 가 있든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무대가 아니겠어. 하늘이 천막이지. 시퍼렇게 살아 있는 목숨 가지고 어디든 발을 붙여 볼란다. 어느 동네든 실수해서 떨어지면 죽고 다치기는 매일반일 테니까." 곡예사의 삶을 그린 작가 한수산의 '부초'는 주인공 하명의 말로 끝을 맺는다. 하명은 잿더미가 된 곡마단 터에서 사랑과 우정을 끝까지 지켜온 단원들과 새 출발을 다짐하는 것이다.동춘서커스 단장 박세환(朴世煥·59), 그의 삶의 발자국을 따라 한국서커스의 맥박은 고동쳐왔다.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최초로 설립한 동춘은 이제 이 땅에 유일하게 남은 서커스단이다. 버팀목이 된 박단장이 없었다면 동춘의 호흡도 벌써 멈췄을지 모른다.

"이 한 세상 누군들 광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랴만/ 나 박세환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광대로 살아온 지/올해로 서른 여덟해가 되었다/ 이제 고향은 현실의 지도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저 허공에 펄럭이는 깃발 꽂혀 있는 땅이면 그 곳이 어디든 고향이 아닌가." 광대로 40년을 살아온 한 사내의 고백이다. 그가 들려주는 자작시에는 바로 부초들의 삶이 응축돼 있다.

박단장은 요즘 서커스에서 새 희망의 빛을 본다. 앞으로 무대예술의 모든 장르는 서커스와 결합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믿는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태양의 서커스'(캐나다)가 좋은 예다. 곡예사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펼쳐지는 동안 무대에서는 인기가수가 곡예의 내용에 어울리는 노래를 부른다. 서커스와 다른 장르의 동시공연인 셈이다. 이번 가을학기부터 안산의 서울예술대에 출강하면서 박단장은 서커스의 지평을 확장할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인생은 서커스다. 박단장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는 밀양 박씨 종가의 종손이다. 고향 경주의 시조왕릉(박혁거세)도 그의 집안에서 관리한다. 어릴 적부터 부모, 특히 국회의원을 지낸 할아버지의 기대는 남달리 컸다. 그런 그가 부초의 삶을 선택했으니 가족의 실망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박단장은 경주고교 시절 몰래 학교 밴드부에서 트럼펫을 배웠다. 노래솜씨 역시 전교에서 알아줄 정도로 뛰어났다. 졸업과 더불어 그는 가출, 유랑의 길을 떠난다. 대학진학도 포기했다. 63년 열 아홉의 나이였다. 언젠가 경주에서 공연했던 동춘서커스를 찾아나선 것이다. 예인의 꿈을 이룰 유일한 통로로 선택한 것이다. 수원에서 동춘서커스를 만난다. 단장은 동춘서커스를 창단한 고 동춘(東春) 박동수(朴東壽)였다.

"고향주변 공연 때는 일부러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집안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염려가 됐거든요. 그런데 소문을 들은 할아버지한테 결국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집안 망신이다. 내가 잘못 가르쳐 잘못된 길로 들어섰으니 함께 죽자'며 쥐약을 꺼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끝내 손자를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무대에 설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허드렛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 먹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2년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관객이 너무 적자 사회자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선배 남철씨의 부인이 그의 등을 떼 밀었다. 그 날 이후 박단장은 동춘의 새 별로 떠올랐다.

그는 만능엔터테이너였다. 사회는 물론이고 노래도 불렀다. 코미디와 연극도 했다. 남사당줄타기도 배워 줄타기 곡예로 인기를 끌었다. 코미디언 장항선씨는 입단동기이자 친구다. 코미디언 남철 남성남 서영춘 백금녀, 배우 허장강, 작곡자겸 밴드마스터 이봉조씨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들도 어렵던 시절 동춘에서 한솥밥을 먹던 선배들이다. TV로 진출한 동료나 선후배들이 대중의 우상으로 자리잡아 가는 모습을 본 그는 무척 고민했다. 하지만 결코 서커스를 떠날 수는 없었다.

동춘서커스는 1925년 창단됐다. 일본인이 운영하던 서커스단 직원으로 일하던 박동수가 차별과 횡포에 맞서 한국인 곡예사를 이끌고 독립한 것이다. 목포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던 그는 무엇보다 마음이 넉넉했다. 박세환씨가 동춘의 별로 성장하자 스카우트의 손길이 뻗쳐왔다. 박동수는 그를 양자로 삼아 위기를 넘긴다.

"단원을 자식처럼 아껴라. 나약한 모습을 절대 보이지 마라." 박동수가 양아들 박세환씨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80년 겨울 동춘의 보물이었던 코끼리 제니가 얼어죽었다. 박단장은 화를 속으로 삭였다. 오히려 단원들 앞에서 큰 소리를 쳤다. 다시 한 마리 사자고. 태풍은 가장 큰 적이다. 지난 9월 광양공연을 앞두고 태풍 '매미'가 상륙했다. 공연시설이 모두 파괴됐다. 광양시가 재해상황보고서에 기록한 피해액만 4억2,000만원에 달했다. 가건물이라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인명사고다. 곡예를 하다 10m 허공에서 떨어져 숨진 곡예사도 있었다.

서커스의 황금기는 TV시대가 도래하는 60년대로 막을 내린다. 70년대 초까지 존속하던 18개의 서커스단은 하나 둘씩 사라지고 동춘서커스와 동춘이 거느리고 있는 한국곡예예술단 뿐이다. 사실상 하나만 남은 것이다. 동춘서커스는 올들어 부천에서 상시공연을 하고 있고 한국곡예예술단은 성주에서 묘기를 펼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고단한 육신이 마지막으로 잠들 곳도 동춘의 깃발이 펄럭이는 천막 아래라고 생각한다. 박세환, 그는 부초들의 영원한 대부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예술의 도시 부천 도움으로 상설공연장 마련 등 "활기"

전용공연장과 서커스학교―박세환단장이 평생 간직해온 꿈이다. 전용공연장의 꿈은 실현단계에 이르렀다. 내년에 상동에 들어서는 전용공연장 부지 3,500평은 부천시가 마련해주었다. 현재 동춘서커스가 상시공연을 하고 있는 자리다.

"3년전 부천에서 공연할 때 입니다. 생면부지의 원혜영시장이 저와 단원을 점심에 초대했어요.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묻기에 한국서커스의 현실과 발전방향을 설명하고 전용공연장 문제를 꺼냈습니다. 관심있게 듣던 원시장은 '서커스가 말하자면 대중예술의 원조나 다름없는데 앞으로 부천시가 힘껏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날 만남이 계기가 돼 전용공연장이 탄생하게 됐다고 밝힌 박단장은 그 보답으로 부천을 한국서커스의 메카로 가꾸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서커스학교에는 두 과정이 개설된다. 곡예사 양성을 위한 전문부문과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교실이다. 후원자가 나서면 서커스학교도 곧 실천에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마스터플랜이 돼 있다. 서커스는 이미 지구촌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사랑을 받는 문화상품이 됐다. 나라마다 전용공연장은 물론 서커스아카데미에서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서커스의 본래 의미는 원형경기장이다. 고대 로마시대 전차경주가 벌어지던 장소였다. 서커스공연장이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이유다. 서커스의 고향은 유럽이다. 18세기 초 사람과 말의 곡예인 곡마에서 비롯됐다. 영국 런던의 피카디리서커스는 세계의 명소가 되고 있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국립서커스극장이나 덴마크 코펜하겐의 전용공연장도 마찬가지다.

서커스는 나라마다 국민의 정서를 프로그램에 반영하는 특징이 있다. 러시아는 말, 인도는 코끼리곡예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는 마술이 장기다. 중국은 주로 그릇이나 접시 등 생활용품을 도구로 활용하는 접시돌리기와 통굴리기가 특징이며 북한의 평양교예단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고 난이도 높은 공중곡예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한국에 서커스가 도입된 시기는 1910년 이후 일본에 의해서 였다. 우리나라에도 예전부터 서커스와 비슷한 곡예가 존재해왔다. 남사당패를 중심으로 이뤄진 줄타기, 버나(접시돌리기), 무동놀이 등이 그 것이다. 이런 곡예는 한국서커스의 중요한 묘기로 자리잡았다. 동춘서커스의 묘기는 마술, 아크로바트, 저글링, 자전거 고공비행, 쌍그네, 큰 그네 손 놓고 타기, 줄타기 등 30여 가지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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