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청 보건소에는 전국의 어느 자치구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수 시설이 있다. 자폐아 뇌성마마비 등 중증 장애인들을 위한 치과 진료실이다. 이곳은 거의 무료다. 관내 치과의사들의 자원봉사로 운영되기 때문이다.전국 최고 부자동네 의사들을 험하고 궂은 사회봉사의 마당으로 이끌어낸 공무원 전칠수(50·서울 서초구청 보건소 의약과장직대)씨. 지난 3일 행정자치부와 SBS가 공동 주최한 제7회 민원봉사대상에서 본상을 수상한 그는 "생각을 바꾸면 미래가 보인다"고 말한다.
전씨가 치과 진료실을 추진하게 된 것은 상관의 지시에서 시작됐지만 그의 솟구치는 아이디어와 추진력이 아니었더라면 일이 제대로 성사됐을까 미지수다. 전씨는 1996년 초 "장애인을 위한 치과 진료시설을 검토해보라"는 구청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실행에 옮겼다.
무엇보다 장애인들의 실정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우면동의 중증 장애인 시설에 들렀는데, 거기서 큰 충격을 받았다. "어느 장애인의 어머니가 '아이가 입에서 피와 고름이 나오는데도 도무지 입을 벌리려고 하지 않아요. 아이가 고기 씹는 맛을 알게 된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며 눈시울을 붉히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전씨는 의료기구 제작업체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장애인을 위한 특수 기구를 주문했다. 이 과정에서 치과 진료의 권위자이던 고 기창덕 박사의 도움도 받았다. "일반인용 의료 기구를 적절히 조립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한동안 제작업체 직원들과 작업장에서 함께 살다시피 하면서 기구를 만들어갔습니다." 장애인 치과 진료는 고난도의 작업이 요구되고 의료사고 위험도 높아 의료 사각지대로 남아있는 분야이다. 관련 시설을 갖춘 곳이 현재 서울대병원, 국립재활원 등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다.
그 해 9월 어렵게 만들어진 진료소에 대한 반응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환자가 쇄도하면서 운영비 부담이 엄청나게 커진 것이죠. 의사 등 진료인력을 더 늘려야 하는 판인데 예산은 한정돼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이리 저리 부심하던 끝에 전씨는 '에라, 말이나 한번 꺼내보자'는 심정으로 관내 병원 문을 노크하게 된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시간이 바로 황금 같은 의사들에게 자원봉사 나오라고 하는 것은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잖아요. 돈뿐인가요. 노력봉사까지 해야 하는데."
그러나 전씨의 설명과 설득이 먹혀 들어가기 시작했다. 의사들이 하나 둘씩 동참을 표시하면서 결국 지금의 단단한 자원봉사 의료진이 구축됐다. 한 자리에서 일체의 진료과정이 이루어지도록 만들어진 보건소 1층 20평 크기의 진료실에는 요즘 장계봉, 박건배, 최종호씨 등 관내 의사들이 돌아가면서 나온다. 이곳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면서 올해만 해도 중증 장애 환자 1,000명이 찾아왔다. 제주도, 부산에서도 온다. 그래서 올해에는 전용 버스도 마련했다. 보건소에는 24시간 야간응급실이 자치구로는 유일하게 운영되고 있다.
경남 합천 출신으로 방송대 보건위생과를 나와 9급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전씨는 이번에 상금 300만원과 함께 승진예정 증명서를 받았지만, 그에 비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 "각박한 이기주의로 흐르기 쉬운 부자동네에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생각을 심는데 공무원인 제가 조금이라도 기여했다는 보람이죠."
/이민주기자 mjlee@hk.co.kr
사진 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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