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군······오늘은······산에서······자는 날도 아닌데······왜······이렇게 늦는구?"아들이 전장에서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설움처럼 눈물처럼 그렇게 온달 어머니가 내뱉는 독백. 흩뿌리는 눈 속에서 그네는 중얼거리고, 그 웅얼거림은 입 안에서 낮고도 처절하게 부딪친다. 지옥의 시간처럼 긴 호흡 속에서 더듬거리듯 혹은 우물거리듯 내뱉는 그 말. 몇 백 권의 책 분량이 넘는 대사들이 머리 속을 스쳐갔지만 내 어찌 그 대사를 잊을 수 있을까.
'광장'으로 널리 알려진소설가이자 빼어난 극작가인 최인훈 선생은 온달 설화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라는 희곡으로 다시썼다. 궁중의 더러운 정치 놀음을 비판하다가 왕위를 놓고 다툼을 벌이던 오빠들에게 쫓겨난 평강 공주는 우연히 산 속 집에 물을 얻어 마시려고 들렀다가 온달을 만난다.
그리고 오빠들을 넘어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온달에게 문무의 재능을 가르친다. 신라, 백제와의 전쟁에 나선 온달은 백전백승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평강의 오빠들은 온달을 암살한다. 공주의 꿈속에 나타난 온달은 이렇게 말한다. "죽어서야 비로소 당신을 예전과 똑같이 얽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공주가 사랑의 의미를 그제야 알고 온달 어머니를 찾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궁중에서 나온 장군은 공주마저 죽여 버린다. 이 처절한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온달 어머니는 아들을 기다리며 독백을 한다.
그네의 백발 위로 흰 눈은 내리는데 공주가 죽기 전 걸쳐준 밝은 진홍색 배자는 얼마나 징글맞게 붉던지. 윤회, 인연, 업을 통한 만남의 신비, 속속들이 들여다 본 원시적 인간관계, 사랑과 죽음. 그렇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는 연극을 가슴떨리게 만드는 그런 신비로운 단어들이 특유의 시적이고 정제된 언어로 녹아 있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극단 '자유'가 1970년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작품이다. 이 공연을 두고 김정옥 선생은 '반사극'(反史劇)이란 타이틀을 내걸었다. 그 정도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당시 기존의 역사나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문제작이었다. 채진희가 평강공주를, 추송웅이 온달을 맡았다.
그리고 나는 온달 어머니 역을 맡았다. 죽음을 바라보며 지척지척 사립문을 나서는 온달의 어머니를 나는 무대, 연극, 그리고 모두의 우주로 다시 돌아와 남은 그 무엇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호흡조차 멎어버릴 것 같은 팽팽한 긴장….
그 때 내 나이 스물 여덟이었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그토록 절실하게 늙은 어머니 역할을 한 걸 보면 지금 내가 봐도 신기할 정도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통해 나는 71년 동아 연극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도 나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라는 수 많은 찬사를 들을 수 있도록 나에게 라스트 신을 허락했던 온달 어머니에게 감사 드린다. 나의 정신, 나의 육체를 통해 사람들의 서정을 격동하게 만드는, 배우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증명해 준 그 마지막 장면.
그 라스트 신을 떠올리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제내 생의 라스트 신을 준비할 때'라고. 온달 어머니를 무대에서 연기하던 그때 내 모든 걸 쏟아 부었듯 내 인생의 마지막인 4막도 생에서 최고로 응집된 에너지를 분출해야 한다. 그건 내게 선택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그 무엇이다. 연극이 그러하듯 인생도 라스트신이 가장 아름답고 강한 울림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나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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