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8월29일 아침 황해도 서흥 군수가 병을 앓다가 사망했다는 보고가 황해도 관찰사에게 올라왔다. 잠을 자던 서흥 군수 최동식이 갑자기 머리를 심하게 떨더니 아무 말도 못한 채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고를 목격한 사람은 오직 관아에 남아있던 향장(鄕長·조선 시대 향청의 우두머리) 문정순과 통인(通引·수령 아래서 잔심부름 하던 하급 서리) 오영창 뿐이었다.
젊은 군수의 뜻밖의 죽음
문정순은 군수의 죽음이 너무나 뜻밖이라고 말했다. "8월27일에는 군수께서 통인 한 명을 데리고 각 관청을 순시했는데 이튿날 몸이 좋지 않다고 하시며 공무(公務)를 폐하고 아무도 방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28일 저물 녘에 군수께서 저를 부르시기에 즉시 들어가 안부를 여쭈었더니 '내가 본래 앓고 있는 병이 있어 늘 환절기만 되면 발병하네'라고 말씀하시더니 '역참(驛站·역마를 바꿔 타던 곳)의 주사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손이 떨려 답장을 쓰지 못하겠으니 대신 써 주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나이가 많고 눈이 어두워 대신 써드리지 못하였고 통인 오영창을 불러 쓰게 했습니다. 답장을 하고 나자 군수께서 제게 '밥은 먹었느냐'고 묻고는 나가서 밥을 먹고 돌아오라고 하시므로 제가 저녁을 먹고 향유사(鄕有司·서울과 교류가 있는 시골 단체의 직원) 임상율과 함께 들어가 건강 상태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군수는 '향청(鄕廳)이 비어있을 것이니 향유사는 나가서 향청을 지키시고 향장은 잠시 내 방에 머물면서 병중의 무료함을 덜어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내 한밤중이 되어 돌아가 쉬려는데 군수의 숨소리가 거칠어져 이상한 생각이 들어 오영창과 함께 침소에 들어가 병세를 살폈습니다. 군수께서 눈을 감고 머리를 마구 흔드는데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다급하게 몸이 어떠시냐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고 이어 정신 차리라며 여러 차례 불렀으나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황당하여 방자에게 여러 서리들과 향청의 유사(有司·사무직원)를 불러 모으라고 하였는데 당시 김성대는 신병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향유사 임상율, 서리 박근호·박용화·한문규 등이 차례로 들어와 서로 상의한 후에 상장벌 사는 의사 김씨를 청해 진찰하였습니다.
김 의원은 '이는 화증(火症)이라 지극히 치료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배 즙으로 시험해 보십시오'라고 답하였고 저희는 급히 배 즙을 짜서 숟가락으로 군수님의 입에 흘려 넣었지만 전혀 삼키지 못하였고, 전신이 펄펄 끓다가 인시(寅時·새벽 4시 전후) 즈음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망국을 개탄한 유서가 발견되다
문정순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군수께서 급사하자 저희들은 당황하였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시신을 수습하기로 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시신을 관아에 두는 것이 예의가 아니므로 즉시 다른 방에 옮기려 하다가 이부자리를 들추어보았더니 거기에 종이 몇 장이 있었습니다. 통인 오영창이 꺼내 보았더니 서울 본댁에 보낼 서간 하나와 서리들에게 내리는 고시(告示), 그리고 유서(遺書)였습니다. 시신을 수습하다가 유서를 발견하게 된 저희들은 군수의 죽음을 어떻게 보고할지 서로 논의하다가 유서에 스스로 자결한다는 말이 정확히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자살로 보고하기보다는 일단 병환으로 숨졌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중대한 일을 경솔하게 처리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군수와 가장 가까운 오영창 역시 같은 진술을 했다. "28일 군수께서 계속 자리에 누워 계시면서 공무를 중지하므로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진지를 올릴지 여쭈었더니 '아직 먹을 생각이 없으니 분부를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저녁 때 또 다시 물었더니 그때는 가지고 오라고 하셨지만, 수저를 들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장탄식을 하며 돌아 누우셨는데 그날 새벽 갑자기 향장이 불러 달려가 보니 그만 이렇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8월29일 서흥 관아의 사령 옥선일은 부음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울 옥인동 군수의 집으로 자전거를 달렸다. 부고를 전해 들은 가족들은 크게 놀랐고 군수의 큰 형님과 조카가 우선 서흥 관아로 떠날 채비를 했다. 상 치를 물건들을 마련하라고 가족들에게 분부한 그들은 30일 옥선일과 함께 서흥으로 향했다.
군수의 큰 형님은 관아의 서리들이 전해주는 서간과 유서를 받아 들고 망연자실했다. 그리고는 서리들을 향해 비장하게 말했다. "이는 내 아우의 친필이 옳구나. 일전에 내 아우가 보낸 편지에 반드시 죽겠다는 말은 없었으나 내용이 시국을 대단히 개탄하는 것이었는데 끝내 이런 변고가 생겼구나. 내 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혹이 없지 않았는데 이제 이 편지를 보니 의혹이 풀린다. 만일 노친이 안 계셨더라면 나 역시 따라가고 싶구나."
9월2일 서울에서 내려온 군수의 형은 철도를 이용해 시신을 집으로 이송했다. 값싼 철로로 운반한 것은 군수의 유언 때문이었다. 서흥군의 오영창과 서리 김재민 등이 함께 호상(護喪)해 서울로 따라갔다. 혹 문제가 생기거나 조사할 일이 있으면 이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군수의 가족은 이미 친필 유서를 본 데다 검시를 하지 말라는 망자의 유언도 있고 해서 급히 선산으로 옮겨 시신을 매장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옥인동 집에서 급한 전갈을 들고 하인 하나가 달려왔다. 매장을 멈추라는 것이었다.
일본인 고문의 개입과 뜬금 없는 소문
내부(內部·지금의 행정자치부)에서 검시를 하겠다니 즉시 서흥 군수의 시신을 서서(西署·서울 서쪽을 관할하던 경찰서)로 옮기라는 명이었다. "애초에 검험을 청한 일이 없는데 검험이라니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내 당장 내부에 들어가 검험을 면하게 해달라고 청할 것이다. 일단 운구나 하관을 하지 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라." 군수의 조카가 자리를 떴다. 그는 한참이 지나 어스름할 무렵에서야 돌아왔다. 내부에 들어가 유서를 보여주고 의심할 것이 없다고 누누이 설명하고 면검을 요청했지만 내부 관리들은 그저 모든 결정은 일본인 고문(顧問)이 한다는 답변뿐이었다. 차라리 일본인 고문에게 직접 가서 면검을 요청해보라는 식이었다. 결국 일본인 고문실에도 들어가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질 않았다는 말이었다.
군수의 가족은 세상을 한탄하면서 시신을 일단 서서로 유치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검시를 했는지 안 했는지, 검시를 했다면 사인에 대한 정확한 결과는 나왔는지 전연 알 수 없었다. 참으로 답답했지만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아마 일본인 고문은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장례식을 치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그런데 희한한 소문이 서흥군 사람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실은 군수가 시국을 한탄해 자결한 것이 아니라 세금으로 거둔 공금을 가지고 쌀 무역을 하다가 6만 냥을 손해보고 이를 채워넣기 어렵자 비관해 죽은 것이라는 말이었다. 어디서부터 흘러나온 소문인지 모르겠으나 군수의 죽음을 악의적으로 조작하는 내용임에 틀림없었다.
서흥군 서리 김성대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관아의 재정 문제도 책임지고 있었다. "유서를 여러 사람이 보았으며 친필 여부를 군수의 형님께서도 확인하신 바입니다. 어찌 비밀이나 감추어진 진실이 있겠습니까. 제가 군수의 가장 가까운 서리로 의외의 죽음을 당한 것만도 통분(痛憤)을 금할 길이 없는데, 지금 공금으로 무역하다가 실패하여 비관하였다니 도대체 이 무슨 말입니까? 돈으로 말하자면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군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인데 읍내의 우매한 백성들이 사정도 알지 못한 채 어디서 망설을 듣고 이런 소문을 퍼뜨리는지 만일 추호라도 의심할 만한 형적이 있다면 제 몸을 바쳐서라도 사실을 밝혀낼 것입니다." 그는 비통하게 마지막 진술을 늘어놓았다.
군수의 시신은 서울로 보내져 일본인 관할 하에 놓인 상태이며, 심문만 따로 황해도 서흥군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이미 검시와 심문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사를 담당한 황해도 관찰사는 차라리 내부에서 서흥군의 서리를 불러다가 조사하는 편이 낫겠다는 볼멘 목소리를 했다. 내부 관리들 역시 자신의 권한과 책임을 일본인 고문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1906년 이미 대한의 국운은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졌다. 의병장 신돌석, 최익현, 민종식, 기우만 등이 모두 그 해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며 심지어 평해 군수 강재천은 군수직을 버리고 의병운동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젊은 서흥 군수 역시 우국충정으로 애국의 자결을 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흘러나온 애매한 소문과 함께 그의 죽음은 역사 뒤로 사라져 버렸다. 곧 이을 망국의 운명처럼 말이다.
글 김 호 규장각 책임연구원
그림 이철량 전북대 교수
서흥군수의 유서
시국에 대해 생각하니 다만 통곡하고 유감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내가 본래 용렬하고 우매하여 살아도 세상에 이익이 될 것이 없고 죽어도 나라에 손해가 될 것이 없으니 살고 죽는 것에 경중이 없으나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스스로 금할 수 없어 보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하여 이제 이와 같이 하련다. 괜히 주변 사람을 의심하지 말 것이며 시신도 드러내 검험하지 말기 바란다.
1906년 8월 27일 서흥 관아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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