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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86>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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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86>국화

입력
2003.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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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한 달이 훨씬 넘도록 연구실 앞 꽃밭에 있던 가을 국화가 때론 빛깔로 때론 향기로 아침을 새롭게 해주었는데, 오늘 아침 하얗게 서리를 맞고 선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꽃을 보는 즐거움도 접어야 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긴 산과 들에 피어 있던 야생 국화(산국, 감국, 구절초, 쑥부쟁이 같은)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입니다.생각해 보면 우리가 때를 늦추어 혹은 앞당겨 다양한 빛깔의 국화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를 엿보고 열심히 연구한 결과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까지 자연 속에서 적용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치와 법칙이 있는데 이중에 몇 가지 중요한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우선 때를 가리지 않게 됐다는 점입니다. 국화 같은 가을 식물을 흔히 단일식물이라고 부릅니다. 낮이 짧아지고(短日) 밤이 길어지는 가을이 되면서 피는 꽃을 지칭하는 말이죠. 하지만 점차 어두운 밤의 길이가 더 길어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물질(아직도 정확히 무엇인지를 확언할 수 없답니다)이 밝은 곳에서는 억제돼 있다가 어두워지면 다른 물질로 전환돼 꽃눈을 만들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지요.

과학자들은 이런 사실을 알아내고 국화를 키울 때, 꽃피는 시기를 늦추고 싶으면 아직 때가 오지 않은 것처럼 얼마동안 불을 밝혀주고, 빨리 꽃을 피우고 싶으면 낮에도 빛을 가려줘 빨리 밤이 온 것처럼 만드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일을 하는 데는 비용이 필요하므로 국화꽃 값이 이러한 시설에 투자를 할 만큼 적정 수준을 유지해야겠죠.

요즘 꽃집에서 파는 국화는 참으로 오묘하고 그윽한 빛깔을 갖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진 국화 가운데 보기에 좋거나 추위에 강하거나 혹은 또 다른 장점을 가진 것들을 골라내 이를 삽목(揷木)이라는 복제방법을 통해 똑같은 모습으로 대량 생산한 덕분이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또 울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밤의 길이가 길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시인이 되기 어려운 것일까요?

그래도 그냥 무심히 피어나는 듯한 가을 국화 한 송이를 보고, 수없이 많은 추론과 실험을 통해 겨울이 오도록 국화를 우리 곁에 가져다준 과학자의 상상력 또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시 만큼이나 아름답습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 @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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