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여름도 참으로 어수선했다. IMF사태의 암담한 터널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억눌렸던 불만이 도처에서 폭발했다. 노·사간의 격렬한 대치가 연일 신문 사회면을 메웠다.그 와중에서 처음으로 직장 내 성희롱 문제가 본격적인 사회이슈로 등장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여성들을 괴롭혀온 파행적 가부장 문화가 도마 위에 올랐다. 여성계는 물론, 성격이 다른 온갖 시민·사회단체, 지식인, 언론이 한 목소리로 전선에 섰다. 가해자들이 처벌 받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법적 장치도 강화됨으로써 성적 폭력문제에 관한한 눈에 띌만한 진보가 이뤄졌다.
그 해에 한 사람도 돌을 맞았다. 그는 성실한 직장인이자,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가장이었다. 무엇보다 어려운 성장환경과 장애를 딛고선 사람이었다. "나는 아닙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절망감 속에서 그는 외롭고 힘든 싸움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3년 만에 마침내 결백을 입증 받았다. (주)이랜드의 사보편집장(부장)인 채성태(蔡成太·44)씨다.
얼마 전 서울 마포구 창전동 (주)이랜드 사옥구내에 공고문이 내걸렸다.
'노동조합은 지난 2000년 파업 시에 (주)이천일아울렛 '판매역량강화교육'에 대하여 대내외적인 성희롱 이슈화로 회사에 대해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닷새동안 게시됐던 이 짧고 건조한 문장의 사과문으로 3년 전의 이른바 '이랜드 성희롱 사건'은 외견상 일단락됐다. 다만 남은 게 있다면 아마도 평생 치유되지 않을 채성태씨 마음의 상처 뿐일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은 상당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앞서 롯데호텔 여직원들에 대한 일상적 성희롱 사실이 알려져 여론이 한창 들끓던 때였다.
더욱이 이랜드는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대표적인 기독교기업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런 이미지로 대학생 취업희망기업 랭킹에서도 늘 상위권이었다. "아니, 그 회사에도 성희롱 문화가?" (사실 그 해 다른 노사분규에 비해 크게 두드러질 게 없던 이랜드 사태를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것도 그런 실망감 때문일 것이다)
사안은 단순한 것이었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에 대한 처우개선과 단체교섭 등을 요구하며 돌입한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노조측이 돌연 성희롱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회사측이 '서비스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여직원들을 7차례 군부대로 보내 병영체험교육을 시키면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들을 강요했다는 것. 구체적으로 "군인들을 즐겁게 해줘라" "포옹을 꽉 해라" "음식을 먹여 주어라"는 등의 지시가 있었다고 했다.
사안의 진위여부를 떠나 채씨를 아연케한 것은 그런 지시의 당사자로 '사보 편집차장(당시 그의 직책이었다)'이 지목된 점이었다.
여파는 컸다. 내로라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이 망라된 공동대책위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이 같은 주장을 거의 그대로 담은 '진상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방송과 여러 신문들도 그대로 전했다. (시의에 딱 맞는 이슈였던 데다, '신뢰'할만한 단체들이 '보증인'이 돼주었으니까)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전 그 행사에 딱 2번 사보용 사진을 찍으러 갔을 뿐입니다. 그런 지시를 할 위치도 아니지요. 더구나 저는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쯤에서 그의 장애를 언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는 어린나이에 소아마비를 앓아 걸음이 불편한 지체장애인이자, 말을 심하게 더듬는 언어장애자다. 그래서 " "안의 대화체도 한 두마디 그가 어렵게 뱉은 단어에 필담을 섞어 재구성한 것이다. 사실 그를 직접 만나본 순간 그가 성희롱자로 몰린 일 자체가 당치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희롱자라면 보통 느끼한 분위기에 매끄러운 언변이 연상될진대….)
노조는 그렇다 치고 그 대단한 각계인사들이 저마다 대표를 맡고있는 시민단체들이 그런 발표를 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제게는 '어찌 된 일이냐'는 문의 한번없이 나온 '진상조사결과'였어요. 하도 기막혀 수없이 편지를 보내고 이메일을 띄웠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책임지고 사과하거나 발표를 정정하려 하지 않았다. 직접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게 보통이었지요. 심지어 말 못하는 바보취급이나 당하고…." 그 과정에서 장애에 대한 비아냥은 번번이 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냈다. 노조는 '벙어리 행세, 탄로…' 따위를 함부로 문건에 써댔고, 심지어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의 간부는 "벙어리가 자랑이냐"며 몰아붙였다.
생각다 못해 형사고소를 했으나 결과는 기각. '공익을 위한 일'이었다는 게 이유였다. 변호사도 없이, 더욱이 말조차 자유롭지 않은 처지에서 홀로 그 막강한 단체들에 맞섰으니 어쩌면 법리다툼 이전에 패소는 예정된 것이었다.
속 시원한 승소는 뜻밖에 노조 지도부가 이듬해 봄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1억7,000만원짜리 성희롱관련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뤄졌다.
시민단체들이 대거 개입된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회사는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았다. 소장에서 일방적으로 매도된 채씨가 이번에도 홀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원고측이 주장하는 성희롱 행사 날짜와 자신이 실제로 현장에 있었던 날짜와의 불일치, 노조 고소인단 명부에서 발견한 유령 신청인·고소인 등 명백한 반증 자료들을 찾아냈다. 마침내 지난해 5월 법원은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원고측이 항소했다가 결국 올해 5월 항소취하서를 제출함으로써 최종 확정됐다. 만 3년 가까이, 햇수로 4년을 끈 법적 싸움이 마침내 마무리됐다.
(혹 편견을 우려하는 이를 위해 판결내용을 요약한다. '이 사건 군부대 교육은 성차별이 아니고, 위법한 신체접촉 강요나 언어적 성희롱이 일어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노조의 파업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이 사건 소를 제기한 것으로 판단하여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정말 길고도 고통스러운 세월이었습니다.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면 뒤에서 '성희롱이나 하는 주제에' 따위의 얘기들이 들렸어요. 친구들의 위로도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것 같았고…. 평소 말 없으신 작은 아버지가 설날에 술 드시고는 불쑥 한마디 하시더라구요. '예수쟁이도 바람 피우냐?' … 죽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은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어딘가에서 듣고 와선 묻더란다. "아빠, 성희롱이 뭐야?" (그는 이 대목에서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속 깊어 내색 안하는 중학생 아들 보기도 민망했다. 아내(41)가 자칫 무너질지 모르는 남편을 격려해가며 찬바람 감도는 집안 분위기를 데우려 무진 애를 썼다.
순서가 뒤바뀐 감이 있지만 사실 그의 이력은 이런 류의 추악한 스캔들과는 애당초 거리가 먼 것이었다. 경북 문경 산골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극한의 빈곤과 이중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피땀으로 점철돼 있다. 행상으로 중학을 마치고 대구직업훈련원과 서울공고를 옮겨 다닌 끝에 인하대 전자공학과까지 졸업했다. 독서실에서 청소를 하고 학교의 허드렛일을 하며 공부를 하면서도 고교 졸업 때는 우등상과 서울시교육감상을, 대학 졸업 때는 시장상을 받았다.
졸업 후 잠깐 삼성전자를 거쳐 이랜드에서 사보 '아름다운 정상'을 만들면서부터는 91년부터 3년 내리 한국사보기자협회, 잡지협회로부터 대상 등을 받을 만큼 탁월한 능력을 인정 받았다.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지역신문은 '배움 향한 불굴의 인간승리'란 제목으로 그의 감동적인 삶을 크게 다뤘다. (이 때 답지한 400여만원의 성금을 그는 전액 학교와 복지단체에 내놓았다) 그 때 "평생 나보다 더 불우한 이웃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했던 약속은 지금도 그의 삶을 올곧게 지켜주는 지침이다.
무엇보다 그는 권력으로부터 힘없는 시민의 권리를 지키겠다던 시민·사회단체들의 진실과 책임 회피에 여전히 분개하고 있다. 그들 역시 또 다른 권력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 대표들 중에는 존경 받는 명망가부터 현 정부 고위직에 오른 이까지 즐비하다) 오죽하면 "NGO 바로잡기 시민연대라도 결성하고 싶다"고 했을까.
하지만 어찌 그들 뿐이랴. 숱하게 판결문을 보내고 호소했음에도 불구, 당시 사건을 보도했던 언론사 어디도 그의 명예회복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심지어 사건을 특집으로 방영했던 TV도, '성폭행 공화국'이라는 신랄한 칼럼을 게재했던 신문까지도. (그들로선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일찌감치 효용성이 떨어진 아이템이니까)
그래서 그는 여전히 자신이 사회에서 성희롱자로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뒤늦게나마 그의 이야기를 다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기사는 한편의 짤막한 참회록과도 같은 것이려니….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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