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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75>車今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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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75>車今奉

입력
2003.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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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2월8일 사회주의 운동가 차금봉이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9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몰(沒). 차금봉의 사인은 고문후유증으로 생긴 심장성 각기증이었다. 그는 1928년 7월 일본 경찰의 좌익 사범 일제 검거를 피해 오사카(大阪)를 거쳐 도쿄(東京)로 몸을 피했다가 체포되었다. 체포될 당시 차금봉의 직업은 살수부(撒水夫)였고, 직책은 제4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겸 경기도책이었다.유럽의 한 정치사회학자는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의 검술 선생"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를 비롯해서, 19세기 이래 많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차금봉은 그 말을 믿지 않았던 프롤레타리아였다. 중외일보가 1929년 3월12일자 그의 부고 기사에서 적었듯, "노동운동의 선각 차금봉은 학교에서 조직적으로 공부한 일이 별로 없"었다. 그의 공식 교육은 서울 미동보통학교에서 끝났다. 그러나 서울역 화부 견습공을 거쳐 기관사로 현장 노동을 시작한 차금봉이 31세로 생을 마감했을 때, 그는 한국 노동운동의 수석 교사가 돼 있었다.

차금봉은 3·1 운동 당시 서울역 앞에서 노동자 시위를 지도하면서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듬해에는 조선노동공제회 결성에 참가했다. 한국 최초의 전국적 대중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는 당초 지식인들이 지도부를 이루고 있었으나, 차금봉은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지식인 배척 운동을 벌여 이 단체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가 시대일보에 쓴 글의 제목대로, 차금봉은 늘 '노동자의 입장에서 노동운동의 전도'를 바라보았다. 그가 1928년 3월 제4차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로 뽑힌 것은 한국 좌익 운동의 역사상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노동자가 노동자 정당의 최고지도자가 된 유일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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