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2월6일 김병곤이라는 사내가 위암으로 서른일곱의 삶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경남 김해 출신의 김병곤은 1971년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과대학에 입학한 이래 길지 않은 삶을 민주화운동에 소진시켰다. 그 시대의 많은 민주화운동가처럼 그도 감옥과 거리를 제 삶의 둥지로 삼았다.대학 3학년 때인 1973년 유신 반대 시위로 처음 구속된 김병곤은 이듬해의 민청학련사건, 1985년의 민민투사건, 1987년의 구로구청사건(제13대 대통령 선거일에 서울 구로갑구 투표 도중 밀반출된 부재자 투표함의 공개를 요구하며 시민들이 구로구청으로 가 항의농성을 벌이다 1000여 명이 연행돼 200여 명이 구속된 일) 등 군사독재정권 치하의 시국 사건들에 잇따라 연루되며 옥살이를 했다. 그의 몸에서 암이 발견된 것도 구로구청 사건으로 징역을 살던 중이었다.
민청학련사건 재판 때 김병곤은 21세로 구속자 가운데 가장 어렸으나,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최후 진술 앞머리에 '영광입니다!'라고 외침으로써 법정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 뭉클한 장면에 대한 감회를 시인 김지하는 '고행, 1974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분명히 사형은 죽인다는 말이다. 죽인다는데, 죽는다는데, 목숨이 끝난다는데, 일체의 것이 종말이라는데, 꽃도 바람도 눈매 서늘한 작은 여인도, 어여쁜 놀 가득히 타는 저 산마을의 푸르스름한 저녁 연기의 아름다움도, 늙으신 어머니의 주름살 많은 저 인자한 얼굴 모습도, 일체가, 모든 것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버린다는데, 그런데, '영광입니다'.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드디어 죽음을 이긴 것이다. 병곤이 한 사람, 나 한 사람이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집단적으로 이긴 것이다."
고종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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