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시련의 시대를 맞고 있다. 미국 경제가 침체의 늪을 벗어나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주요 기업을 이끄는 CEO들의 자리는 더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일간지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는 4일 "미국의 최고경영자들은 고액의 퇴직수당을 받기로 계약하고 고액의 연봉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지위는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상황"이라고 보도했다.세계 최대 항공기 제조업체인 보잉사의 필 콘디트 회장이 1일 전격 사임하고, 월트 디즈니사의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이 사임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은 CEO들의 수난을 잘 보여준다. 델타 항공의 레오 뮬린 회장도 내년 1월 CEO에서 물러나고 제럴드 그린스타인이 후임을 맡을 예정이다.
컨설팅업체인 부즈 앨런 해밀턴의 보고서는 "타의에 의해 물러난 CEO는 2001년 25%였으나 지난해에는 39%로 크게 증가했으며 금년에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라면서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그렸던 사회(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를 연상시킨다"고 분석했다.
최고경영자들이 물러나는 최대 요인은 전통적으로 회사 주가 하락 등 경영실패다. 하지만 요즘엔 회사의 신뢰성 유지 등 도덕성도 주요 시비 거리로 등장했다. 특히 회계 부정 스캔들이 논란이 되면서 법적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더라도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적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보잉사가 최근 최고경영자를 물갈이한 것은 국방부와의 공중급유기 계약 스캔들 때문이다. 미 공군의 조달 담당 부차관보를 지낸 달린 드러연(여)은 금년 초 보잉사의 미사일 방어시스템 담당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경쟁자인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보잉보다 낮은 가격을 제시할 것이라는 비밀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 보잉사는 지난달 말 드러연 부사장을 해임한 뒤 필 콘디트 회장까지 물러나게 했으며 미 국방부는 보잉사와의 계약 추진을 유보했다. 뉴욕증권거래소(NYSE) 말단 사원에서 출발해 36년 만에 회장 자리까지 오른 리처드 그라소도 지난 9월 수년간의 총봉급이 1억8,800만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로 밝혀진 뒤 반강제적으로 사임했다. 대형 뮤추얼펀드의 하나인 스트롱파이낸셜 그룹의 CEO인 리처드 스트롱은 다른 회사와의 부정거래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2일 사임 의사를 밝혔다.
디즈니사 경영진의 갈등은 회사의 주가 하락 등 경영 성과를 둘러싼 책임론과 맞물려 있다. 이 회사 창업자인 월트 디즈니의 조카인 로이 E 디즈니 부회장은 지난달 말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전문경영인 출신인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의 사임을 촉구했다.
메드트로닉사의 회장을 역임한 윌리엄 조지는 "최근 3년도 되기 전에 CEO들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 경영 초점이 장기적 고객관리보다는 단기적 주가관리 등에 모아지는 것은 문제"라고 CEO의 잦은 교체를 우려했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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