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일종의 심리게임이다. '경기가 좋지 않을수록 여성의 치마는 짧아지고 남성의 넥타이는 화려해진다'는 속설이 역사상 아무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을 얻는 이유다. 이 심리게임은 일년에 두번, 컬렉션이라는 전장(戰場)에서 패션산업의 최선봉에 있는 디자이너와 소비자간에 벌어진다. 2004년 봄ㆍ여름 디자이너들은 '색(色) 쓰는 여자가 아름답다'고 선제포를 쏘았다. 자, 소비자인 당신의 대응은 무언가.달콤하게 화사하게- 여자의 몸에 색을 입혀라
불황의 우울한 그림자를 휙 내던지고 싶다는 뜻일까. 1~3일 서울 강남 서울무역전시장(SETEC)에서 펼쳐진 SFAA컬렉션은 '색의 제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화사한 꽃내음으로 가득찼다. 봄여름 시즌에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블랙&화이트의 무채색 계열이나 베이지 브라운 등 흙색에서 따온 어스(earth)톤 색상은 주춤했고 연두와 노랑, 오렌지 흰색 등 밝고 낙천적인 색상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복고적인 여성미에 초점을 맞추되 최근 몇 년간 인기였던 치렁치렁하고 낡은 듯한 빈티지 느낌 대신 클래식하고 우아한 감각으로 풀어낸 것도 특징이다. 프릴과 러플 리본 플리츠 등 로맨틱한 장식들이 여전히 쓰이되 집시스타일의 과잉장식으로 흐르던 분위기는 크게 줄었다. 대신 상류사회의 절제된 고급스러움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미지가 바뀌었다.
치마길이는 무릎길이부터 종아리까지 다소 길어져 성숙한 느낌. 올해 돌풍을 일으킨 미니바람은 반바지쪽으로 이동, 엉덩이 곡선이 살짝 노출될 정도의 울트라 숏팬츠가 선보이기도 했다.
면 실크 등 전통적인 여름용 소재는 물론 종이장 처럼 얇게 무두질한 스키니가죽(피부처럼 얇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도 유행소재로 많이 사용됐다.
사흘 일정 컬렉션의 문을 힘차게 연 것은 '베티 데이비스 아이스'라는 주제의 박윤수씨. 1980년대 빅히트를 친 킴 칸스의 동명 팝송을 배경음악으로 옅은 갈색 뱅헤어(앞머리를 눈썹아래서 일자로 자르고 뒷머리는 길게 늘인 스타일)의 모델들이 무대를 갈랐다.
바이어스로 입체재단한 칵테일드레스들은 신체의 굴곡과 움직임에 맞춰 유연하고 아름답게 출렁였다. 초록과 인디언핑크, 화이트 등 화사한 색상에 치마밑단은 비대칭으로 재단했다. 예전의 공격적인 섹시함 대신 사랑스럽고 고전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무대였다.
손정완씨의 무대는 과감하고 재미있는 믹스&매치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달콤한 파스텔 칼라의 엠파이어스타일(허리선을 가슴밑으로 끌어올린 형태) 원피스와 같은 색으로 물들인 깃털장식, 반짝이는 에나멜 소재의 숏팬츠 등 사랑스러운 복고무드가 특색.
최근 2년간 완성도 높은 무대로 각광받았던 루비나씨의 쇼도 기대에 부응했다. '에너제틱 바디(energetic body)'라는 주제답게 작품들은 인체의 해부학적 특징을 스포티즘이라는 패션계의 빅트렌드안에서 유연하게 표현했다. 핑크 가죽점퍼에 줄무늬로 파이핑을 하고 무릎아래길이의 시가렛팬츠는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의 움직임을 보여주고싶다는 듯 재단됐다. 경쾌하고 완성도 높은 컬렉션.
진태옥씨는 '여신'이라는 주제로 벨에포크시대(19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직전까지의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시대)의 부드럽고 우아한 여성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내놓았다. 허리선을 밑으로 내려 느슨하고 슬림한 실루엣을 살렸고 촘촘히 주름을 잡아 만드는 핀턱레이스와 테이핑처리 등으로 특유의 선적인 이미지를 모던하게 풀어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복고와 우아함이라는 두개의 키워드를 어떻게 독창적으로 풀어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춘 가운데 이상봉 박동준 김삼숙씨 등은 오리엔탈리즘과 에스닉(민속풍)을 바탕으로 무대를 꾸며 차별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상봉씨는 무당의 복식에서 보이는 화려한 문양과 색상을 이용한 역동적인 무대로 호평받았다.
박동준씨는 멕시코의 화가이자 페미니스트 운동가였던 프리다 칼로를 소재삼아 다양한 프린트물을 선보였다. 또 김삼숙씨는 동양화의 장면들을 프린트하고 겉과 속의 배색을 달리해 은은하게 비치는 효과를 낸 다양한 리조트웨어를 선보였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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