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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29> 군산 오송회(五松會)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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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29> 군산 오송회(五松會) 사건

입력
2003.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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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 내용> "4·19 정신을 본받아 의로운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이광웅) "일상에 연연하여 사회정의와 양심에 따르지 못하고 우물쭈물 살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박정석) "약하고 용기 없이 살아왔다"(전성원) "한 일도 없고, 하고싶은 일도 못하고 살아온 비겁한 삶이었다"(황윤태) "살아남을 권리도 없는 비겁한 놈이었다"(이옥렬)는 말을 하며 반국가단체를 만들었다. <학생 교사(敎唆)>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은 그 목적이 미국에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일 뿐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이 아니다" "농민들이 저곡가에 시달린다" "북한에도 지하철이 있다" "빈익빈 부익부야말로 우리 나라의 구조적 문제다" "월남과 자유중국의 패망은 그 정권의 비민주성과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너희들도 앞으로 현실을 똑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돼야 한다"면서 북한을 찬양·동조했다.

1982년 11월 25일 전북도경은 군산제일고등학교 현직 교사 8명과 전직 교사 1명 등 9명을 '오송회(五松會)'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이들의 모의 내용과 제자들을 교사한 발언을 열거했으며, 증거물로 월북시인 오장환(吳章煥·1916∼?)의 시집 '병든 서울' 필사본과 김지하 시인의 '오적'이 게재된 일본 잡지 '불귀' 등을 제시했다. 오장환은 일제시대 서정주 김동리 등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일원으로 활동하다 48년 2월 월북했다.

오송회 사건의 발단은 '병든 서울'이었다. 82년 여름 시외버스 속에서 이 시집의 복사본이 발견됐는데 신고를 받은 경찰이 이를 추적하다 군산제일고 교사들의 '모임'을 포착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함께 구속됐던 채규구(蔡奎求·51·군산 진포중 교사)씨의 설명. "5·18 직후부터 선생들이 모여 독서그룹을 만들고 토론도 했다. 동료교사인 이광웅(李光雄·92년 53세로 사망) 시인이 짐을 정리하다 어렸을 때 시집 '병든 서울'을 베껴두었던 노트를 우연히 찾았고, 그것을 동료 교사인 박정석(朴正石·59·현 서울 대명중 교사) 선생이 복사해 갖고 있었다. 한 제자가 복사본을 박 선생에게서 빌려 갖고 다니다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경찰은 전북대 철학과 모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랬더니 그 교수는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등의 구절을 지적하며, 지식인 고정간첩이 복사해 뿌린 것 같다고 진단했다. 경찰이 국문학과 교수를 찾아갔더라면 오송회 사건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찰은 큰 기대를 갖고 내사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광웅 시인과 박정석 교사, 황윤태(黃潤泰·52·현 개인사업) 이옥렬(李鈺烈·50·현 전북 이리공고 교사) 전성원(田成源·49·현 미국 거주) 교사 등 5명이 '5·18 위령제'를 갖고(박정석 교사 인터뷰 참고), 평소 자주 모여 '정부 비판' 발언을 했음을 알았다. 경찰은 이러한 일들을 엮어 5명이 소나무 숲에서 모였다며 '오송회'란 이름을 만들고, '군산제일고 교사 고정간첩단'으로 몰기 위한 로드맵을 작성했다. 한때 군산제일고 교사로 있으면서 이들과 교분을 가졌던 당시 KBS 남원방송국 방송과장 조성용(趙成湧·66·현 전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씨를 '간첩단의 수괴'로, 채규구씨 등 다른 동료 교사들은 동조 혹은 불고지 죄목으로 구속했다. '고정간첩'의 필수 요건인 북한과의 연결고리로는 '최후의 5·18 수배자'로 불렸던 윤한봉(55·현 광주 민족미래연구소 소장)씨를 지목했다.

박정석씨와 채규구씨에 따르면 당시 경찰은 '김일성-윤한봉-이광웅-오송회'라는 계보도를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 11월 초부터 군산경찰서와 전북도경으로 연행된 오송회 교사들은 경찰이 제시한 '계보도'와 '역할분담표'대로 진술하지 않는다며 지하 대공분실에서 40여일간 심한 고문을 당했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도 고문한 경찰들이 바로 뒤에 앉아 시인을 강요했고, 진술 내용이 조금이라도 틀리면 다시 지하실로 끌려갔다. 이들 교사들은 한결같이 "처음에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나중에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매달렸다"고 말했다. 경찰은 윤한봉씨와의 관계를 끝까지 캐물었다. 윤씨는 광주민주화운동 직전(5월 17일) 광주를 벗어났으며 이후 서울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 이광웅 교사의 매제 집에 숨어 지냈던 적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여동생 집에 들렀던 이광웅씨가 윤씨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경찰은 이를 빌미로 '윤한봉의 지휘를 받은 오송회'를 강요했던 것이다. 윤씨는 이미 81년 4월 29일 경남 마산에서 화물선으로 밀항, 6월 4일 미국 워싱턴주에 도착했으며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의 도움을 얻어 정치적 망명 허가를 받았다. 오송회 사건이 진행 중에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다. 결국 군산의 교사들이 미국에 망명해 있는 윤씨의 지휘를 받은 꼴이 되어 경찰은 스스로 '계보도'를 수정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재판부는 1심에서 이광웅(징역4년), 박정석(징역3년), 전성원(징역1년) 외 6명에게 선고유예를 내렸다. 석방된 교사들은 선고유예마저 인정할 수 없다며 항소했다. 그러나 고법은 오히려 이광웅(징역7년) 등 3명의 형량을 대폭 늘리고, 나머지 6명도 징역2년6월∼1년씩을 선고하여 모두 법정구속했다. 83년 12월 대법원은 고법의 선고형을 확정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박정석 당시 군산 제일고 교사

1982년 11월 2일 퇴근길 학교 앞 가게에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동료 교사들과 모였다. 신청했던 은행 융자금이 나온 날이었다. 소주를 막 시켰는데 이광웅 교사가 잠시 자리를 비웠고, 이어 누군가 밖에서 나를 찾는다고 했다. 그들은 경찰서에서 왔다면서 막무가내로 차에 태웠다. 눈이 가려진 채 전주로 갔다. 주택을 안가로 개조한 전북경찰서 대공분실이었다. 그날 저녁 이광웅 교사가 먼저 그렇게 끌려왔고, 나에 이어 전성원 교사가 왔다. 당시 나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82.3.18) 때문인 줄 알았다. 얼마 전 서울대 운동권 제자 중 한명이 방화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으라며 사건 피의자 문부식(文富軾)의 항소이유서 복사본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나는 그것을 읽고 몇몇 동료들에게 이야기 했으며, 집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문과 함께 그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답변은 '교사 간첩단 조직, 월북 기도' 등이었다.

군산제일고에 근무하면서 평소 뜻이 맞는 교사들이 어울려 시대 상황을 고민하고, 함께 책을 읽곤 했다. 이른바 독서모임 형태의 서클이었다. 당시 읽고 토론한 책이라고 해야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정도였다. 특히 고교(이리 남성고) 선후배인 우리 5명은 자주 어울렸다. 그 해 4월 19일 막걸리 10병과 오징어를 들고 학교 뒷산(장군봉)에 올랐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4·19가 기념일에서 제외된 것을 분개하며, 우리끼리 '4·19 기념식'을 갖자고 했다. 우리는 정상 부근 소나무 숲에 앉아 간단한 추모식을 가졌다. 우리는 1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5·18 사건을 얘기하며 희생자들을 위해 술을 따라놓고 묵념을 했다. 그것이 '5·18 위령제'로 둔갑했고, 오장환의 '병든 서울'이라는 시집이 오버랩되면서 우리는 '체제전복을 기도한 공산주의자'로 몰리게 됐다.

그 해 여름 서울대 다니던 제자들이 집에 놀러 왔기에 내가 갖고 있던 그 시집의 복사본을 보여주며 '어머니'라는 시가 좋으니 한 번 읽어보라고 했다. 학생들이 그것을 돌려 읽었는데 한 학생이 전주∼군산 시외버스에 두고 내렸던 것이다. 일부 시에 표현된 '인민'이나 '인공'이란 말에 놀란 버스 안내양이 그것을 경찰에 신고했다. 내사 결과 시집의 출처가 우리들로 밝혀지자 평소 우리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던 경찰은 교사 간첩단 사건으로 옭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만든 내용은 '오송회라는 지하단체를 조직, 4·19를 맞아 5·18 위령제를 지낸 뒤 5명이 오른손을 겹쳐 잡고 북한을 찬양·고무하는 강령을 만들어 외웠다'는 내용이었다. 그 때 오송회라는 표현을 처음 들었다. 김일성 장군을 흠모해서 장군봉에서 모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뒷산'으로 알았지 그 명칭이 장군봉인 줄은 몰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함께 군산 앞바다를 통해 월북하려 했다고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황윤태 선생이 배를 구입하려 했다고 이미 실토했다"며 다그쳤다.

그들은 "남들처럼 부동산 얘기나 하고 여자 얘기나 할 것이지 너희들이 뭘 안다고 광주가 어떻고 미문화원 사건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술안주로 삼느냐"고 윽박질렀다. 안가에서의 고문과 조작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다. 그것들의 이름이 물고문 전기고문 통닭구이 등이었음은 한참 뒤에 알았다. 다음해 1월 11일 기소되고 비로소 가족면회가 허용될 때까지 43일간 이러한 고문을 받으니 나중에는 '내가 실제로 그런 일을 했다'고 믿는 상황에 이르렀다. 유치장에서 이옥렬 선생을 만났을 적에 내가 "우리가 손을 포개고 강령을 외웠을 때…"라고 말하자 그가 "선생님, 그렇지 않습니다"고 말해 나는 '이옥렬 선생이 거짓말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변호사들의 법정 설명에 의하면 그러한 현상은 장시간의 감금과 공포로 인한 강박감·위축감으로 생기는 '파라노이아(paranoia) 편집증'이라고 했다.

1심에서 3년을 선고 받았으나 2심에서 5년으로 형량이 늘었다. 당시 문규현 신부와 황인철 변호사 등을 통해 고문·조작 사실이 알려지자 고등법원은 오히려 우리의 형량을 높였다. 5년을 거의 다 채웠을 무렵, 87년 6월 항쟁이 있었고, 7월 17일 특사로 풀려났다. 서울로 올라와 학원강사 등을 전전하다 전교조 복직투쟁 결과 99년 9월 복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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