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내게도 분명 비빌 언덕이 있었다. 1966년 6월에 창단돼 우리 연극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극단 중의 하나인 자유는 내겐 단순한 언덕이 아니라 고향과도 같은 존재다. 극단 '자유'(自由). 그곳은 '연극배우 박정자'가 태어난 출발점이었으며, 연극계의 스타가 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 준 작은 우주였다.극단 '자유'는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는 이병복 선생의 적극적인 의지로 탄생했다. 흔히들 이병복 선생을 연극 의상 디자이너나 무대 미술가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1950년대를 전후해 '여인소극장' 동인으로 활동했다.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서 디자인을 전공해서 배우에서 디자이너로 전업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는 연극인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그는 극단을 재건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아예 새로 극단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당시 '민중극장' 연출가이던 김정옥 선생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김정옥 선생은 나옥주, 김혜자, 함현진, 최상현 등의 배우와 함께 민중극장에서 빠져 나와 '자유' 창단에 참여했다.
이화여대 연극반 시절 '피의 결혼' 연출을 맡았던 김정옥 선생의 눈에 들었던 나도 자연 극단 자유에 참여했다. 나옥주 선배의 추천도 극단 자유에 몸담게 된 계기가 됐다. 소속 극단이 생겼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대 연극반 시절 만났던 김정옥 선생과 함께 연극을 할 수 있어서 마냥 즐거웠다.
김정옥 선생은 지금도 그렇지만 생전 화내는 법이 없고 마냥 부드러운 양반이다. 그러나 한 번 고집하는 것은 기어이 해내는 외유내강의 표본이다. 웬만해서는 어깨나 목에 힘주는 법이 없는 그는 이대 연극반의 연극 연출을 맡았을 때도 스스럼 없이 여학생들과 어울렸다. 당시 중앙대 연극영화과 교수이던 김정옥 선생은 여학생들과 함께 버스에 탈 때면 종종 학생표를 내곤 했다. 차장은 그럴 때마다 꼼짝없이 속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너무 우스워서 자지러지곤 했다. 문예진흥원 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신 김 선생은 요즘 팔당 근처에 박물관을 짓느라 한창 바쁘시다.
극단 자유에는 자랑거리가 많았다. 나옥주 선배는 TV에 많이 출연하던 배우로 김용림, 윤소정, 김관수 등의 탤런트 출신 배우들을 더 끌어왔다. 여기에 최불암, 김혜자, 문오장 등이 가세했고 영화감독 김홍식도 참여했다. 그리고 이름만 들으면 누군지 금세 알 수 있는 화려한 멤버들이 1966년 3월 진고개의 '향원'이란 한정식 집에 모였다. 창립 모임을 가진 후 이병복 선생을 대표로 4월 29일 정식으로 창단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극단 자유는 단원들의 소속감을 드높이기 위해 '동인제'라는 이색적인 형식을 취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주간지이던 주간한국은 극단 자유의 시스템을 이렇게 평했다. '극단의 뜨내기적인 성격을 지양하기 위해서 동인들에게 극단을 위한 작업량에 따라 동인주를 배당한다는 색다른 형태를 갖추어 극단 운영을 합리화함으로써 연기자들에게 일정한 개런티를 지불하는 길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형태의 극단을 지향하던 '자유'가 처음 선보인 공연은 이탈리아 극작가 에두아르도 스칼페타의 '따라지의 향연'(원제 '가난과 고상')이었다. 미천한 따라지들이 귀족으로 변장하여 펼치는 한바탕 희극이었다. 김정옥 선생님의 주장에 따라 뒤렌마트의 '물리학자들'을 준비하다가 너무 어렵고 철학적이어서 '따라지의 향연'으로 바꾸었다. 공연 날짜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불철주야라는 사자성어의 의미를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을 새워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당시 장충동에 있던 이병복 대표의 응접실이 우리의 연습장이었다. 그렇게 위태로운 출발이었지만 결과는 좋았다. 주인공을 맡은 최불암씨의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하녀 베티나 역을 맡았던 내게도 관심이 쏠렸다. 그렇게 내 연극 인생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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