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의 백제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 청자 등의 유물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번 발굴은 1971년 무령왕릉 발굴 이후 가장 많은 백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한꺼번에 수습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백제의 영향력이 서기 475년 웅진(현 공주) 천도 이전에 이미 이 일대에 미쳤음을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한다.수촌리 유적의 백제 고분군 6기 중 아직 조사하지 못한 1기를 뺀 5기에서 나온 금동관은 2점, 금동신발은 3켤레, 중국제 자기는 6점이다. 이번 발굴을 맡은 충남발전연구원의 이훈 책임조사원은 "이들 고분은 백제의 웅진 천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며 "출토된 금동관은 익산 입점리 고분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며, 금동신발은 무령왕릉과 인근 송산리, 원주 법천리 고분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환두대도, 금제 귀고리, 곡옥과 관옥, 금동과대 각 1점, 재갈 등 마구류, 중국제 흑유도기 3점, 완형 토기 20여 점 등도 나왔다.
백제사를 전공하는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이번에 나온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 청자는 백제가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이 일대를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자료"라고 평가했다. 그는 "금동관이나 금동신발은 아무나 만들고 쓸 수 있던 것이 아니라 권력을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일정한 형태와 공식성을 띤다는 점에서 이들 유물은 지방 토착세력의 것이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한 왕족이나 귀족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풀이했다. 유물이 동일한 형태로 수촌리 등 여러 군데서 나오는 것은 백제의 세력권 범위와 확장 과정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중국 청자 또한 백제의 중앙 정부가 동진에서 일괄 수입해 지방에 나눠주던 것임을 감안할 때 백제가 웅진을 다스린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유물이 백제가 웅진 시대를 열기 전 이 일대에 강력한 토착세력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한상 동양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기존의 공주 유적이 대부분 금강 남쪽에 위치한 데 비해 이번 발굴 지역은 금강 북쪽에 있다는 점에서 백제 왕실과는 다른 현지 세력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는 475년 9월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죽자 한 달 뒤인 10월 웅진으로 천도한다. 이처럼 빨리 수도를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에 웅진이 백제의 세력권 안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4세기 중반 이후 백제의 역사적 상황과 영토를 설명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온조왕 본기' 에 따르면 369년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 이후 백제의 영토는 웅천(지금의 금강)을 지나 공주보다 훨씬 남쪽인 노령산맥 이북 고사부리(현 전북 고부)까지 미쳤으며, 왕족이나 귀족을 파견해 이들 지역을 다스렸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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