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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Hwapy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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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Hwapyung

입력
2003.1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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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火病)의 영문 의학명은 Hwapyung이다. 한글 발음을 그대로 표기한 것이 국제 정신의학계가 정한 세계 표준명으로 통한다. 1970년대부터 의학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해 1996년 미국 정신과협회에서 '한국인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으로 정신질환의 일종이라고 공인해 이렇게 부른다. 강한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 우울증, 그리고 신체화 증세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질환이다. 증상은 가슴에 불을 댕기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된다. 한국인에만 있다고 해서 문화결함증후군으로 분류된다고 한다.■ 스트레스 질환 중에서도 유독 한국인에만 이런 증상이 나타나 고유명칭까지 얻었던 당시 이는 놀랍고도 희한한 화제였다. 흔히 '화병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듯이 사망원인도 되는 질환임을 의학이 설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적 스트레스'인 셈인데, 그건 아마도 한국사람들이 워낙 억눌림을 많이 당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리라. 한국인만의 고유정서라 할 한(恨)도 마찬가지다. '한' 역시 영문으로 표기한다면 화병처럼 발음 그대로가 아니고는 그 뜻을 정확히 담지 못한다. 화병이 주로 여성들에게서 많았다는 점을 봐도 억눌림의 병이라 할 만하다.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문화와 생활 체계 아래서 남모를 질환을 앓아온 셈이다.

■ 얼마 전 한 대학병원의 화병클리닉은 한국의 남성 화병환자들이 99년보다 세 배나 늘었다는 통계를 내놓은 적이 있다. 그 배경으로 취업난 실직 조기은퇴 등 경제난으로 인한 사회적 요인이 지적됐다. 좌절이나 공포감, 공허함 등이 깊은 병을 만드는 셈인데, 대증요법과 함께 정신치료 과정이 수반된다고 하니 환자들의 고통이 짐작된다. 이 클리닉의 전문의는 환자의 대부분이 신체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중년남성들이라고 전하면서 가정과 가족의 사랑을 가장 중요한 처방으로 꼽았다. 여성환자들의 경우 분노를 참는 상태에 머무는 데 비해 남성들은 화를 분출해 폭력으로 발전한다고 한다. 시대와 사회가 바뀌니 화병 발생의 패턴도 달라진 것이다.

■ 화를 못 참는 증세들은 중년 남성들에게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금도를 넘어서는 온갖 험한 말들, 시위마다 흔해진 화염병과 폭력, 내 주장만 옳다는 집단 아우성 등 요즘 흔한 장면들이 모두 마찬가지 증세들이다. 화를 다스리려면 참지말고 발산해 버리는 것도 방법이라지만, 화도 제대로 내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때로 욱하는 듯한 대통령의 언어습관, 여론과 동떨어져 보이는 야당대표의 단식사태 같은 것들도 분노를 다룰 줄 모르는 기술부족의 세태와 다르지 않다.

/조재용 논설위원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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