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의 작은 도시에서 자랐다고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30년도 더 된 옛날입니다.그 시절 '겨울 바다'는 없었습니다. 여름이 지나 피서객이 빠져나가면 바다는 폐허처럼 남겨졌습니다. 철저히 버려진 채 이듬해 여름을 기다렸습니다. 가수 송창식의 노래 가사처럼 간혹 '철 지난 바닷가를 홀로 걷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죠. 그러나 그런 사람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일 거라고 여겨졌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겨울 바다는 이제 여름 바다 못지않은 중요한 여행 테마입니다. 경포 해변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렸습니다. 겨울이라는 계절, 주말도 아닌 평일, 그리고 궂은 겨울비까지. 어릴 적의 빈 바닷가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경포해변에는 많은 여행객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파도에 쫓기며 왕복달리기를 하고, 어른들은 팔짱을 끼고 모래밭을 걸었습니다.
사람들은 왜 겨울 바다를 찾게 되었을까요. 먼저 가고오는 길이 편해졌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강릉행에는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포장 반, 비포장 반인 산길을 따라 10시간 이상 흔들려야 했습니다. 중앙선 열차를 타도 남쪽으로 빙 돌기 때문에 10시간 이상 걸렸습니다. 이제 강릉은 지척입니다. 고속도로 주행 시간만 3시간. 체증이 심한 수도권 여행지보다 오히려 가깝습니다. 문득 충동이 일면 그냥 다녀올 수 있습니다.
교통보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정서적인 것입니다. 여름 바다의 주제가 휴식과 즐거움이라면 겨울 바다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정리와 계획입니다. 한 해가 끝나고 또 새로 시작하는 시기의 여행.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다음 해의 꿈을 마음 속에 그리는 데 제격입니다. 단순히 달력을 넘기며 세월의 마디를 맞는 것이 아니라 그 마디를 내면에 새기는 작업입니다. 의미 있는 여행입니다.
그런 이유로 겨울 바다로의 여행은 깔깔거리는 여행이 아닙니다. 흥청망청 여행도 아닙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파도를 바라보며 시간을 생각하는 사색 여행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보탬이 되는 여행입니다. 그 여행으로 청합니다.
/권오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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