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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8> 헤레나루빈스타인과 마녀 우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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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8> 헤레나루빈스타인과 마녀 우슬라

입력
2003.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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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세상은 공평하다. 성우로서 내가 겪은 시련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보상을 받게 됐으니 하는 말이다. CF 감독인 남편이 어느 해인가 '헤레나 루빈스타인'이라는 화장품 광고를 찍게 되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나더러 "녹음을 하라"고 했다. "녹음을 해주겠느냐"거나 "녹음을 해줬으면 좋겠다"가 아니었다. 남편하고 같이 일을 한다는 건 불편한 일이다. 같이 해본 적도 없고 또 내게 일에 대한 이야길 꺼낸다는 생각조차 없으니까. 그 광고는 남편하고 한 광고작업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내가 화장품 광고하면 안 팔릴 걸?"하고 내가 대꾸했다.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너무 무겁고, 무섭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런가? 그러나 안 해봤던 일이라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광고주쪽에서 남편에게 누구 목소리를 쓸 건가 물었더니 그는 그냥 "신인이 하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주 짧은 카피였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과학으로 만들어진다'가 전부였으니까. 그래도 폭발적 에너지 덕택에 '기관차'라는 별명이 붙은 내가 아닌가. 글자 한 자 한 자에 온 신경을 다 바쳤다. 카피는 한 글자의 방심도 용서되는 게 아니니까. 녹음을 끝내고 나서 나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그게 제대로 된 건지 묻지 않고 돌아왔다. 남편도 잘했다 못했다 전혀 말이 없었다.

그러나 광고가 나가기 시작하면서 반응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 있었다. 화장품 광고엔 미성이 익숙한 사람들이 그 잡아먹을 듯한 목소리에 당황한 것 같았다. 화제는 끊이지 않았다. 광고가 나가고 나서 몇 년이 지나 공연하러 광주에 갔을 때였다. 한정식집 송죽헌 여자가 날 보고 커다란 소리로 "어머 헤레나 루빈스타인이 왔네"라고 했다. 그는 내 이름이 정말 외국말로 된 그 긴 이름이라고 생각한 걸까? 그 다음부터 광고 프로포즈가 자주 들어왔다. 싫지 않았다. 수입은 대책 없는 연극배우의 경제를 어느 정도 책임져 주었다. 그런 것도 살아가는 방편이 될 수 있구나.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내가 성우로서 인정을 받았던 건 광고뿐이 아니었다. 내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지만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에서도 내 목소리가 진가를 발휘한 적이 있다. 1970년대를 주름잡던 가수 윤형주씨를 만난 자리에서였다. "박 여사님, '인어공주'에 나오는 마녀 우슬라 역을 더빙해줄 목소리를 찾고 있는데 오디션 한번 받아 보시지 않겠어요?"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반짝했다. 하지만 오디션이 문제였다. '내가 나이 오십이 다 돼서 오디션할 일이 있나?" 30년 전 학생 신분일 때 오디션을 받아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나로서는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윤형주씨는 외국에서는 적역을 찾기 위해 누구나 오디션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결국 내가 오디션을 받자 모든 사람들이 흡족해 했다. 윤형주씨도 신이 났다. 일본에서 우슬라 역은 실패했다며. 윌트 디즈니측은 내가 몇 소절 노래한 테이프를 가지고 미국으로 갔다. 얼마 후 녹음하자는 연락이 왔다. 아이들은 내가 '인어공주'를 녹음한다는 걸 알고 뛸 듯이 좋아했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좋아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할까. 그럼 이 녹음도 아이들에게 서비스가 되겠지. 게다가 마녀 역할도 재미있었고. '더빙'이라는 작업이 나를 굉장히 흥분시켰다. 연습을 많이 했다. 노래를 배우고 대사를 맞추고, 노래 연습은 주로 자동차 안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틀어 놓고 혼자 했다. 결국 내가 녹음한 우슬라 역은 디즈니사로부터 미국 배우가 소화한 목소리보다 더 훌륭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어공주'는 만화 영화이면서 성인들도 사로잡는 놀라운 영화로 기록되었다. 관객 동원이 어마어마했다는 건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 후 아이들과 함께 TV로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는데 만화영화 '미녀와 야수'에 참여한 안젤라 랜스버리가 나와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제시카의 추리극장'에서 주인공 제시카 할머니 역을 맡아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다. 나는 대뜸 우리 애들에게 소리쳤다. "제시카 할머니가 하는 정도면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윤형주 아저씨가 날 부르지 않는 거지?" 아이들은 나를 보고 웃었다. "엄마, 저건 착한 역이에요." 우리 아이들조차 내 목소리는 악역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쨌든 '미녀와 야수'가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됐고 나는 그 착한 역을 더빙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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