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자신을 소개할 때 늘 '연극배우'라고 말한다. 내 연극을 본 사람은 다들 이 말에 동의해 준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은 연극배우 보다는 내 목소리를 훨씬 더 잘 기억하는 것 같다. 내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목소리는 어머니가 물려주신 선물이다. 어렸을 적부터 졸업식 답사며 웅변대회를 도맡았던 건 모두 타고난 목소리 덕택이었다.내 목소리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이대 연극반 활동에 열심이던 1963년 동아방송국이 개국하면서 동아방송 전속 성우 1기생을 모집한다는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라디오가 유일한 매체이던 그 시절, 성우는 최고의 인기 직업이었다. 퀴즈 프로에서부터 슬프고 기구한 운명을 그린 드라마까지 성우는 모든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고, 우상이었다. 무엇보다 마음껏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끌려 나는 성우가 되고 싶었다.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하는 당대 연속극의 주인공인 고은정, 정은숙, 남성우, 이창환, 주상현 선생님 같은 분들과 같이 방송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었다.
앞뒤 잴 것도 없이 무턱대고 다락 같이 높아 보이던 성우 시험에 응시했다. 그러나 경쟁률은 치열했다. 서울 인구가 300만 명이던 시절에 2,400명이 지원했을 정도였다. 실업난이 만성화한 요즘 취직하려면 몇 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지만 그 당시 100대 1은 기록적 경쟁률이었다.
경쟁률만큼이나 시험 절차도 까다로웠다. 그 많은 지원자들에게 '아버지' 단 한 마디를 소리 내어 부르는 과제가 주어졌다. 아버지 세 글자를 울면서 부르든, 기뻐서 부르든 마음대로 부르게 한 이 기발한 시험을 통과하고도 무려 일곱 차례의 시험을 거쳐야 했다. 최종 관문은 사람의 손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쓰는 논술 시험이었다. 여덟 번의 시험을 통해 나를 포함한 24명의 1기생들이 뽑혔다. 사미자, 전원주, 김무생, 박웅, 김수희, 김영식, 장미자, 이완호씨 등이 바로 동기들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성우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 자퇴서를 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이화여대는 학생의 방송 출연을 금지하고 있었다. 동아방송 측에서도 학업을 계속한다는 데 거부감을 드러냈다. 며칠밤을 새며 고민한 끝에 결국 학교를 그만두기로 했다. 이헌구 교수님과 문리대 학장을 맡고 계시던 김갑순 선생님께서는 학업을 마친 뒤 성우가 돼도 늦지 않다며 말리셨다. 당시 두 선생님의 전폭적 지원 덕분에 "대학극이 기성 극단을 위협한다"는 신문평이 실릴 정도로 이화여대 연극반은 성장해 있었다. 내 재능을 어여삐 여기시던 선생님들께서는 학교를 그만두는 것을 두고두고 서운해 하셨다. 선생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방송에 대한 열망은 지독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동아방송에 입사한 후 혹독한 교육이 시작됐다. 임영웅, 조남사, 이원경 같은 당대 최고의 방송 연출가들이 우리들의 선생님이었다. 2개월의 교육 끝에 주어진 배역은 고작 비명소리나 시장에서 떠드는 소리를 내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이른바 '웅성웅성' 그룹이었다. 더구나 그것도 NG를 내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연출가는 내가 일부러 일을 그르치기라도 한 것처럼 몰아세웠다. 감히 그 자리에서는 입도 벙끗하지 못하다가 방송이 끝나면 화장실로 달려가 우는 게 당시의 내 일과 중 하나였다.
성우 되기의 어려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특하고 개성 강한 내 목소리가 당시에는 문제가 됐다. 똑같이 작품을 하더라도 튀는 내 목소리에 다른 배우들의 목소리가 묻혀 버리니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제작진들은 죽어라 나를 피했고, 자연 방송을 하는 시간보다 성우 대기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을 때가 더 많아졌다. 당시 월급은 쥐꼬리 만한 기본급에 방송 출연 횟수에 따라 수당을 보태 받도록 되어 있었다. 방송 출연이 없다 보니 내 월급은 쥐꼬리 중에서도 가장 짧았다. 대학교 연극반에서 교수님들과 연출가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나는 억울하고 서러웠다. 바야흐로 수난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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