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2일 프랑스 소설가 로맹 가리가 입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66세였다. 자살하기 얼마 전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게 아니라 단지 무명이었을 뿐이네." 유언처럼 돼 버린 이 말은 로맹 가리가 프랑스 문단과 벌인 파천황의 게임 때문에 더욱 깊게 울린다.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에서 태어난 로맹 가리는 10대에 어머니를 따라 니스에 정착해 프랑스인이 되었다. 그의 직업적·문학적 출발은 하층 계급 출신의 귀화인으로서는 두드러지게 화려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자유프랑스 공군으로 복무한 그는 종전 뒤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았고, 외교관이 돼 유럽과 아메리카를 오갔고, 사실상의 처녀작인 '유럽의 교육'(1945)으로 비평가상을 받았다. 볼리비아 주재 프랑스 대리대사였던 1956년 로맹 가리가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상을 받았을 때, 프랑스 문단과 정계는 그에 대한 존경과 질투로 가득 찼다.
그 뒤 자신에 대한 평단의 채점이 박해지자,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자기 앞의 생'(1975)을 발표해 다시 한번 공쿠르상을 받았다. 늙은 유대인 창녀와 사생아 출신 아랍인 소년 사이의 슬프고 굳센 우애를 그린 이 작품 말고도,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여럿 발표했다. 지금 그 소설들에서 로맹 가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누구에게도 너무 쉽지만, 그의 생전에 그 목소리를 들을 귀를 지녔던 비평가는 극소수였다. '재능의 샘이 철철 흐르는' 신예 작가 에밀 아자르와 그를 질투하는 '한물 간 작가' 로맹 가리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은 로맹 가리의 유고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1981)을 통해서야 확인되었다. 로맹 가리는 이 게임을 통해 비평가들의 거드름과 변덕과 무능과 편견을 한껏 조롱한 것이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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