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던 때, 서베를린의 서방 연합군이 쓸쓸히 철수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때까지 연합군이 공식 보유한 주권을 넘겨받는 행사에 즈음하여 독일 지도자들은 40여 년 자유를 지켜준 연합군의 노고를 거듭 칭송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언론은 비로소 완전한 자주와 통일을 이뤘다고 감격해 하면서, 호숫가 넓은 숲 속의 안락한 주둔지를 떠나 귀국하는 미군 병사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외국군 철수에 기꺼워하는 시민들의 반응을 전했다.냉전시대 서베를린은 동독 한가운데 고립된 육지 속의 섬이었다. 1945년 독일을 분할점령한 전승국은 나치제국의 심장부 베를린도 둘로 나눠 동쪽은 소련이, 서쪽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다시 분할해 점령했다. 이어 냉전 대결로 베를린을 유례없이 기묘한 분단 도시로 만들었다. 그 시절 소련 지도자 흐루시쵸프는 "서베를린은 언젠가 썩은 사과처럼 우리 손에 들어 올 것"이라고 호언했다. 이에 맞서 미국의 케네디는 "전 세계 모든 자유인은 베를린 시민이다. 나도 베를린 시민이다"는 유명한 연설로 서베를린 수호를 다짐했다.
냉전 지도자들의 수사에 동서 베를린 시민은 각기 환호했다. 분단을 역사의 장난 탓으로 여긴 이들은 외세의 냉전 전략이 분단과 대치를 부당하게 장기화할 것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민족의 영원한 수도 베를린을 얽어 맨 질곡은 그렇게 독일인 자신의 과오와 외세의 이기심이 합작한 것이었다. 그 강고한 분단과 냉전의 멍에를 상징한 것이 서베를린에 주둔한 미군 6,000명과 영국군 3,500명, 프랑스군 3,000명의 존재였다.
연합군의 지위는 당초 점령군에서 보호자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는 서베를린을 에워싼 소련과 동독의 바르샤바조약군의 전력이 압도적인 상황에서 순수한 군사적 차원보다는 정치·심리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독일과 소련의 주도로 분단이 해소되는 순간, 소련군보다 서방연합군이 먼저 베를린을 떠난 아이러니도 이런 바탕에서 비롯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완전한 주권을 되찾은 독일의 역사적 수도에 외국군이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냉전의 절정기 30만 명에 달했던 서독주둔 미군은 통일 뒤에도 나토 동맹을 명분으로 7만 명이 잔류했다. 이들도 이제 공동의 적이 사라진 정세 변화와 동맹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상당수가 철수할 전망이다. 독일 언론은 미군 재배치가 실행의지를 갖춘 것인지, 아니면 변화의 대세를 비껴가려는 제스쳐인지를 주의깊게 가늠하고 있다.
우리도 서울 용산의 한미연합사와 유엔군사령부를 포함한 모든 미군부대를 한강 이남으로 이전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많다. 미군이 서울에서도 철수하면 북한의 도발에 미군이 자동개입하는 인계철선(Tripwire)이 사라져 수도 서울의 안보가 불안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서적으로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군사적으로 불합리한 논리를 강변하며 많은 국민이 겨우 잊은 안보 불안감을 억지로 일깨우는 것은 문제다.
미군의 인계철선 역할은 이미 오래 전 상징적 차원으로 바뀌었다. 국력이 북한의 수십 배에 이르고 군사력 또한 앞선 상황에서, 미군이 굳이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전의 속성조차 도외시한 것이다. 한국군 지휘부가 남쪽으로 옮겨간 마당에 미군이 서울에 남아야 할 당위성은 없다.
미군잔류 주장에서 엿보이는 것은 영원한 후견인 미국과 미군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것을 불안해 하는 심리다. 민족 자존 등의 다른 가치는 아랑곳없이, 현상에 안주하려는 완고한 이기심이 두드러진다. 외세 배척과 미군 철수를 외쳐야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다. 민족의 자주를 얽어 맨 남북 대치가 반세기를 훌쩍 넘겨 북한이 저 지경으로 허물어진 지금도 미군의 지위와 역할에 어떤 변화라도 있으면 큰 일 날 것처럼 떠드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얘기다.
강 병 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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