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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국정원, 소설가 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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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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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1987년 발생한 KAL 858기 폭파사건을 다룬 소설 '배후'의 저자 서현우(41)씨에 대해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16년간 묻혀 있던 이 사건의 진실이 드러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간 이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실관계는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의 수사결과 발표, 범인 김현희(42)의 수기 '이제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등을 바탕으로 했다. 그러나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데다 거듭 새 의혹이 제기됐고, 1998년 당시 이종찬 국정원장이 KAL 858기 폭파사건을 4대 의혹 사건으로 규정, 재조사 의지를 내비쳤지만 재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의혹1:김현희의 정체

안기부는 수사발표 당시 김이 북한 테러리스트라는 증거로 사진 3장을 공개했다. 72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대표 장기영씨에게 꽃다발을 선물한 평양의 화동(花童) 사진과 일본 기자가 72년 평양 주재 당시 화동을 찍은 사진, 나머지는 평양 남북조절위 회담 당시 대기중이던 화동 사진이었다. 그러나 첫번째 사진의 화동은 귀가 동그란데 비해 김은 세모꼴 모양의 속칭 '칼귀'로 모양이 전혀 달랐다. 인간의 귀는 지문과 같아 성형이 아니면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두 번째 사진은 북한의 '정희선'이라는 여인이 자신이 사진 속의 화동임을 주장하고 나섰고, 세 번째 사진은 남북조절위 평양회담이 아닌 개성에서 열린 적십자회담 사진으로 밝혀졌다.

안기부는 김의 아버지 김원석이 당시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로 근무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앙골라 대사관을 겸하고 있던 짐바브웨의 일본대사관은 앙골라 정부가 발표한 명단에 김원석이라는 이름이 없으며, 수산대표 직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당시 공개된 김의 안기부 자술서에서도 북한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100여 군데에서 발견된 점도 의혹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의혹2:김승일의 정체

안기부는 당시 사고발생 이틀 후인 87년 12월1일 김 일행이 바레인공항을 탈출하다 검문을 받자 음독, 김승일은 현장에서 사망했고 김은 치사량 미달로 살아 남았다고 발표했다. 안기부는 당시 김승일이 김과 2인1조 테러팀을 이룬 주범이며 영어 등 4개 국어에 능통한 전자기술 전문의 정예 공작원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결과 김승일은 키1m71㎝ 몸무게 45.95㎏의 왜소한 체구에 위장 대부분이 수술로 절개된 병약한 70세 노인으로 밝혀졌다. 안기부는 김현희가 체포 당시 독약 앰플을 깨물어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밝혔지만 당시 응급처치를 담당했던 바레인인 의사는 "김에게서는 음독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독극물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의혹3: 폭탄의 정체

안기부는 김승일 일행이 비닐 쇼핑백에 폭발물을 넣어 항공기 기내 선반에 놓고 내렸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항공기 교체 승무원이었던 박길영 사무장은 "김승일이 비닐백을 갖고 있던 것을 보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이들이 사용한 폭탄은 파나소닉 라디오를 개조해 안에다 C-4 350g을 넣은 것과 술로 위장한 PLX 액체폭탄 700cc라고 안기부가 밝혔으나 일본 군사전문가 오가와 가주히사씨는 "이 폭약은 겨우 두부 크기 정도이며 1만m를 나는 비행기를 공중 분해시킬 경우 최소 5분이 걸려 구조신호 발신이 충분하다"고 반박했다. 이 사건 진상규명시민대책위측이 2001년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국과수 이정필 총기분석실장(당시 잔해 분석 담당)도 KAL 858기 잔해에서 C-4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다만 김승일의 복띠에서 전문 테러리스트들이 절대 사용하지 않는 TNT 성분이 검출됐을 뿐이라고 진술한 것으로 돼있다.

의혹4: 잔해와 유품은 어디에

정부는 수색 시작 10일 만인 87년 12월9일 잔해와 유품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색조사단을 철수시켰다. 사고 전날 인도양 모리셔스 해에 추락한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공기는 1년에 걸쳐 잔해와 유품이 발견됐고,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에 요격된 KAL 007기도 1년여가 지나도 계속 부유물이 발견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KAL 858기 잔해 수색은 블랙박스 탐지기인 '수중공명위치탐지기'조차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져 이 사건은 블랙박스를 회수하지 못한 세계 최초 항공기 사고로 기록됐다. 87년12월13일 안다만 해역 부근 육지에서 25인승 구명보트가 발견됐지만 사고 발생 15일 후 해류 이동을 감안할 때 위치가 틀린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90년 5월 태극마크와 88올림픽 공식 항공사라는 의미의 'official'이라는 문자가 새겨진 두 동강난 조각이 김포공항에 도착했지만 전문가들은 수만 개의 기체 파편 중 꼭 맞는 두 조각을 찾을 확률은 4만분의 1이라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명

이 같은 각종 의혹에 대해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개별 사실 관계에 대해 일일이 해명을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아버지의 직업 및 김현희가 화동 사진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관계는 전적으로 김현희 진술에 의존한 것이었기 때문에 실수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당시에도 '김현희가 이렇게 진술하고 있기 때문에 확인 중'이라고 발표했지 단정적으로 확정해서 발표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는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지만 KAL858기 폭파사건은 북한에 의한 천인공노할 테러인 것만은 분명하다"며 "초동수사에 약간의 착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빌미로 너무도 분명한 사건의 진실이 가려지거나 더 이상 호도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박은형기자 voice@hk.co.kr

■1987년 大選 코앞 참사 北 "南이 조작했다" 역공

1987년 11월29일 오후 2시1분(한국 시각) 미얀마 서쪽 벵골만 상공에서 바그다드발 서울행 KAL 858기가 마지막 교신을 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 항공기는 즉시 추락한 것으로 확인됐고, 항공기에 탑승한 해외 근로자 89명 등 93명의 한국인과 외국인 승객 2명, 20명의 승무원은 전원 사망했고 이들의 유해는 한 구도 찾지 못했다.

겨울의 초입에 들려온 느닷없는 대형 항공기 추락 참사 소식은 국민을 놀라게 했고, 테러범으로 추정되는 일본인 2명이 검거됐다는 소식에 국민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2명의 일본인, 즉 구금 과정에서 음독자살한 하치야 신이치(蜂谷眞一)와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는 12월15일 국내로 각각 사체와 신병이 인도됐으며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조사결과 북한 공작원 김승일(사망 당시 70세)과 김현희(당시 26세)로 밝혀졌다.

안기부는 이듬해 1월15일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들이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소속 공작원이며 87년 10월 "서울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한공 여객기를 폭파하라"는 김정일 현 국방위원장의 친필 지령에 따라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안기부에 따르면 이들은 항공기 출발 20분 전인 11월29일 오전 5시5분(한국 시각)께 여행자 휴대용품으로 가장한 라디오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폭탄의 폭파시간을 9시간 뒤로 조작, 휴대한 채 탑승했으며 오전 7시44분께 기내 선반에 폭발물을 넣어둔 채 중간 기착지인 아랍 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 내린 뒤 도주했다가 검거됐다. 당시 안기부 발표에 따라 우리 국민과 전 세계가 북한의 만행을 비판했지만 북한은 "남한측이 조작한 사건"이라며 역공을 가했다.

당시 재야 정치권과 대학가에서는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군사정권이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실제 자살방지용 마스크를 착용한 김현희가 호송원의 부축을 받으며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을 담은 사진이 제13대 대통령 선거 투표일인 12월16일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해 당시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한편 김현희는 당시 수십통의 청혼 편지를 받는 등 뜻하지 않은 유명세를 누렸으며 그가 여성 수사관에게 우리 말로 처음 건넨 "언니, 미안해"라는 말은 한 동안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김현희는 90년 3월 사형 확정판결 직후 사면됐으며 이후 반공 강연과 자서전 출간 등으로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다 97년 12월 결혼한 이후에는 일체 대외활동을 중단했다.

/박진석기자 jse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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