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이론에 치킨게임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에서 치킨은 통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겁쟁이라는 뜻의 영어 속어로, 차가 한 대밖에 못 다니는 낭떠러지 위에서 마주보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다가 겁을 먹고 먼저 브레이크를 밟는 쪽이 지는 미국 깡패들의 게임을 이론화한 것이다. 쉽게 말해, 기차가 달려오는 철로를 베고 누워 있다가 먼저 일어나는 쪽이 지는 1950년대 우리 깡패들의 담력싸움의 미국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이 게임의 결과는 한쪽이 먼저 차를 세워 지는 경우, 둘 다 차를 세워 무승부로 함께 살아 남는 경우, 둘 다 상대방이 먼저 서기를 기다리다 정면충돌해 공멸하는 경우로 나뉘어 진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87년 민주화이후 한국정치, 특히 3김정치가 전형적으로 이 치킨게임의 양상을 띠어 왔다는 점이다.
즉, 불법 정치자금 '20억원+?' 수수 등 한쪽의 결정적인 약점이 나타나면 코너에 몰린 쪽이 상대방의 약점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고, 그러면 공멸을 우려한 3김이 문제를 봉합해 나가는 식으로 전개되어 왔다. 물론 미국의 경우도 클린턴 행정부 시절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과 클린턴 대통령이 치킨게임식 기싸움을 벌여 예산안이 제때 의회를 통과하지 못해 정부가 부도 나는 사태가 발생한바 있다. 미국의 이런 사태가 아주 드문 경우인데 반해 한국정치에서는 밀리면 죽는다는 기싸움과 치킨 게임이 불행하게도 일상적인 모습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후 야당 당사를 방문하고 여야 총무를 만나 상생의 정치를 약속했을 때 우리는 이제 낡은 치킨게임이 3김시대의 종말과 함께 한국정치에서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며 박수를 쳤다. 그러나 이는 착각에 불과했다.
착각이 깨진 것은 국정원장 후보에 대해 국회 정보위원회가 부적합 판정을 내리면서이다. 노 대통령은 이라크파병으로 이탈된 지지기반을 다시 결집하기 위해서는 국정원 인사문제를 둘러싼 색깔대결로 정국을 몰고 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국회와 야당을 설득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인사를 강행해 버린 것이다.
이로써 상생의 정치는 물 건너가고 다시 기싸움의 정치가 시작됐다. 그리고 이 싸움이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가 바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의 단식투쟁으로 상징되는, 내년 총선을 겨냥한 노 대통령과 한나라당간의 치킨게임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와서 이번 사태에 대해 누가 더 책임이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태를 수습하고 정치를 정상화할 것이냐에 있다.
이 점에서 노 대통령 측근비리의혹에 대한 특검법의 재의결을 주장해온 조순형 의원이 민주당 대표에 당선되고 여야가 대화에 나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노 대통령이 재신임 등에 대해 계속 고집을 부리고 있고, 최 대표도 한 인터뷰에서 속내를 밝히고 나선 것이다. 즉, 특검은 단순히 노 대통령의 측근비리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정책 측면에서 볼 때 노 대통령을 이대로 두면 나라가 주저앉기 때문에 대통령의 국정 스타일을 바꾸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노 대통령의 정책들은 좌우 모두에서 비판을 받고 있고 논쟁해야 할 것이 널려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국회를 열고 본격적인 정책대결을 벌여야지, 측근비리로 노 대통령의 발목을 잡아 국정방향을 변화시키려는 꼼수로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잘못됐어도 한참 잘못된 일이다.
노 대통령과 최 대표는 이제 기싸움을 중단하고 함께 호프집에 들러 낡은 치킨게임 대신에 치킨, 즉 통닭이라도 뜯으면서 본격적인 정책토론을 벌이며 국민들에게 상생의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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