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 때까지 인근 사무실을 방문, 과장이상 직급 명함 100장을 모아오라."신도리코 신입사원들의 '유격코스'로 불리는 소위 '뉴콜'의 첫 날은 진땀 흐르는 과제로 시작한다. 10분에 1군데씩, 8시간 발품을 팔아도 50군데가 고작인데 두 배의 목표량이 떨어진다. 100장을 모으는 과정에서 새내기 신도리코맨들이 느끼는 것은 갈증과 허기 뿐이 아니다. 비로소 험한 세상에 뛰어들었다는 실감, 그리고 신도리코는 '절대 만만한 기업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영업 중심의 경영
2002년 매출 5,140억원에 순이익 630억원. 국내 복사기 시장 점유율 1위, 부품 국산화율 1위, 40여년간 정부 조달 실적 1위. 국내 최고의 사무기기 업체로 호평 받는 신도리코가 불황에도 거침없는 기업으로 당당히 자리한데는 3가지 경영 비결이 있다.
첫째는 '영업 중심의 경영'이다. 신도리코 직원들은 입사 첫날부터 영업분야의 훈련을 시작해 "세상에는 두 가지 영업방식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신도리코 영업"이라고 배운다. 이 회사에는 영업의 동의어처럼 인식되는 '접대'나 '리베이트'가 없다. 오직 내세우는 것은 믿음과 성의, 한번 판매한 제품은 끝까지 책임진다는 자세다. 영업소에서는 소장이 직접 복사기를 수리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신입사원 시절에 판매한 제품을 영업소장이 돼서도 직접 챙기기 때문이다. '믿음과 정성을 판다'는 말이 구호에 그치지 않는다.
영업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는 마케팅과 교육, 제품 개발로 이어진다. 요즘 글로벌 기업들이 목청껏 내세우는 '고객 니즈(Needs) 중심의 경영'이 이미 자리잡은 것이다. 그래서 이 회사의 사업부서는 영업과 마케팅, 교육 및 개발 기능이 융합되어 있다.
개성상인 짠돌이 경영
또 하나의 성공비결은 보수적 경영이다. 보수라고 해서 투자는 안하고 돈 되는 장사만 한다는 자린고비식 경영이 아니다. 500년 개성상인의 역사와 철학이 묻어있는 '개성식 짠돌이 경영'이다. 창업주 고(故) 우상기 회장은 개성 출신의 실향민으로, 19세기말 개성에서도 유명한 상단(商團)을 이끌었던 거부집안의 후손이다. 그는 한국전쟁후 혈혈단신으로 월남, 경제성장에 따른 사무기기 시장의 팽창을 예상했다. 그리고 1960년 일본 최고의 사무기기 업체인 리코사를 찾아가 "리코사의 제품이 세계 최고라는 말을 듣고 찾아왔다"는 말 한마디로 한국 독점 판매권을 얻어왔다.
정통 개성상인의 명맥을 이은 그는 물샐 틈 없는 경영을 했다. 복사기에 들어가는 3,000여개 부품 이름을 모두 외웠고, 제조와 영업의 전분야를 직접 챙겼다.
은행돈은 단 한푼도 끌어 쓰지 않는 무차입경영을 고수하며 신제품개발과 국산화에만 재투자하는 일을 40년간 반복했다.
리코가 국산 복사기 제조에 필요한 부품을 주지 않으려고 하자 본사 앞마당에서 완제품을 해체해 필요한 부품만 들고 왔다거나, 쓰레기장을 뒤져 못 하나라도 멀쩡한 물건이 버려져 있으면 노발대발했다는 일화가 창업주에 대한 직원들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직원과 사회를 끌어안는 가족 경영
마지막 비결은 '삼애(三愛)의 가족 경영'. 신도리코의 직원 복지는 대기업을 능가한다. 대졸 초봉이 2,600만원 내외에 우수 인력은 1년 안팎의 해외연수를 보내고 입사 7년차 사원은 예외 없이 선진업체 견학을 한다. 직원들의 근무환경과 정서함양을 위해 수백억원을 들여 미술관 같은 사옥을 짓고, 한가운데 직원용 실내 농구장을 만들었다. 창업 후 단 한번도 인위적 감원을 하지 않았고, 우석형 회장이 사원 2,000여명의 이름을 모두 외운다. 레스토랑처럼 깔끔하게 차려진 식당에서는 밥을 꼭 주발에 퍼서 준다. 마치 집에서 식사를 하듯 내 밥그릇에 양껏 먹으라는 배려다.
어음을 쓰지 않는 것도 같은 취지다. 신도리코는 거래업체에게 100% 현금을 즉시 결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업체간에 공정한 이윤을 보장하고 신의로 거래하는 개성식 상도다. 요즘 같은 불황기에 신도리코 협력업체들이 건재한 이유기도 하다. 이는 기업의 근본인 사회에도 다름이 없다는 설명이다. 우상기 창업주는 생전에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이 나라에 이바지하는 길"이라며 고의로 많은 세금을 냈다고 한다. 영업본부 김성웅 실장은 "사회 속의 기업, 기업 속의 사람, 모두가 서로 아껴야 할 한 가족이란 것이 삼애의 의미"라고 말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 신도리코는
신도리코는 국내 최초의 복사기를 생산한 사무기기 메이커다. 1960년 신도교역과 일본 리코가 50대 50의 지분으로 창립, 1964년 첫 국산 복사기를 개발하고 81년에는 팩시밀리 생산도 시작했다.
82년 기술연구소를 설립, 차세대 사무기기 개발에 나섰으며 94년 세계 최초로 종이걸림을 자동제거하는 복사기를 선보여 국내 시장을 장악했다.
2001년에는 레이저프린터 '블랙풋'을 개발, 미국 렉스마크에 연간 100만대를 수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3년 만에 개발한 국산 디지털복사기 '디지웍스'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중견기업으로는 드물게 200여명의 석· 박사급 연구인력을 갖추고 서울· 아산· 중국 청도에 연간 200만대 급의 생산라인을 갖춰 사무기기의 자체개발 및 생산능력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인정받고 있다.
신도리코는 최근 PC환경과 인터넷 네트워크 기능이 강화된 디지털복사기 '디지웍스'에 주력하고 있다. 이 제품은 사무실 랜(LAN)에 간단하게 연결해 프린터, 복사기, 팩스, 스캐너 등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복합 사무기기로, 기존 제품의 3분의 2에 불과한 가격과 쉬운 유지관리로 각광 받고 있다.
신도리코의 올해 매출 목표는 6,200억원으로, 이중 65%인 4,000억원을 수출로 벌어들일 예정이다. 1996년 거래소에 상장됐고 주요 주주는 신도사무기(20.6%), (주)리코(20.0%), 우석형 회장(11.7%), 우자형 신도창업투자 부회장(6.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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