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처음 뾰족구두를 신고 오빠가 입학 선물로 사준 빨간 재킷에 타이트 스커트를 차려 입고 이화여대 교문을 들어선 새내기 대학생. 나는 봄바람처럼 밀려온 자유의 공기 속에서 한껏 들떠 있었다. 그 지긋지긋하던 수학 시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교과목과는 관계 없는 소설책을 실컷 볼 수도 있었고 영화관에 가더라도 단속 나온 선생님이 있나 살필 까닭도 없었다. 게다가 넓은 캠퍼스와 고전적 건물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고 시절 가끔 무용 공연을 보러 이화여대 강당에 가본 일은 있었지만, 정작 학생이 되고 보니 눈에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이 눈에 띄었다. 캠퍼스를 누비는 선배들은 봄날처럼 화사했다. 너무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였다.아침 강의가 없는 날은 나는 조조 할인 영화관을 찾아 다니며 영화를 봤다. 그렇게 1학년은 연극과 별 상관없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채플 시간을 마치고 강당을 나서다가 게시판을 봤다. '문리대 연극부 주최 ― 연극 공연에 관심 있는 학생은 참여 바람.' 나는 그 투박한 카피에 혹했다. 그때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연극을 봤지만 정식으로 무대에 한 번도 서 본적이 없었으니…. 그러나 한편으로는 '학생들이 제대로 연기를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큰 무대에서 빛나는 별과 같았던 배우들이 그려내는 인생의 만화경을 볼만큼 봤다고 자신하던 내게 '대학교 연극반'이라는 꼬리표는 시시하게만 느껴졌다. 광고 문구는 머리에서 금세 사라졌고 결국 나는 좀더 일찍 한국의 명연출가와 만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당시 무대에 올려진 작품은 '리시스트라타'였는데 훗날 극단 자유를 창단한 김정옥 선생이 연출을 맡았다.
새내기 시절이 끝나고 2학년이 됐을 때 다시 오디션 공고가 나붙었다. 이번엔 프랑스 극작가 장 라신느의 '페드라'였다. 전처 소생인 아들을 사랑하게 되는 비운의 왕비 페드라, 세상이 결단코 허락하지 않는 사랑에 빠져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페드라, 광기어린 열정과 섬세한 여성성을 한 몸에 지닌 페드라는 고전 비극에 나오는 여인들 중 가장 강렬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다. 나는 페드라 역을 해볼 욕심에 선뜻 오디션에 응했다. 당연히 페드라 역이 내게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페드라 역은 가정과에 다니던 선배에게 돌아갔다. 나는 대사라고는 열 여섯 마디가 고작인, 왕비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시녀 '파노프' 역에 캐스팅됐다. 실망이 너무 커서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막상 연습을 시작하고 보니 페드라 역의 선배가 보여주는 연기는 훌륭했다. 결국엔 자존심을 접고 연습에 몰두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에 서자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제대로 연기를 할 수 없었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 독약을 먹고 쓰러지는 왕비를 시녀인 내가 무릎을 꿇으며 손으로 받쳐야 하는 장면에서 실수를 하다니…. 이일로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고 막 돌아온 연출가 양동군씨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콧대 높았던 나는 일거에 무너졌다. 그러나 수확도 적지 않았다. 연기란 끊임없는 연습이 있어야 잘 할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하지고도 명쾌한 진리를 무대 첫 데뷔를 통해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99년 극단 자유(自由)의 '페드라' 공연이 있었을 때 왕비 역을 맡게 됐다. 실로 37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엄청난 신분 상승(?)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그토록 갈망하던 역을 맡았지만 내 안에서 페드라를 육화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출을 맡은 김정옥 선생은 보다 섬세하고 나약한 모습의 페드라를 그려 주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건 내게 무리였던 듯 싶다. 문학적 체취가 흠씬 풍기는 시적 대사를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공연이 마지막에 달했을 무렵 독약을 먹은 페드라가 무대위로 걸어 나오며 읊조리는 대사가 있다. 어이쿠, 그 대사를 난 깡그리 잊었다. 하녀일 때는 왕비를 제대로 받아내지 못해서 쩔쩔 매더니 왕비 역을 맡고서는 그 중요한 마지막 독백을 잃어버리다니. 다행히 관객들은 내 침묵을 연기로 받아들였고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페드라는 그렇게 나를 진땀 흘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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