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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태섭의 은인 - 故 김영구 풍한산업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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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태섭의 은인 - 故 김영구 풍한산업 회장

입력
2003.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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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섭(李台燮·64) 국제라이온스협회 세계 회장은 1980, 90년대 활발한 정계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재계에서는 전문 경영인 1세대로 꼽힌다. 그는 미 MIT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대우엔지니어링, 우풍화학, 풍한방직 등 여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활약하다가 정계에 입문했다. 그가 MIT에 유학하고 전문 경영인으로 일하게 된 것은 김영구(金泳龜·1911∼99) 고 풍한산업 회장과의 인연이 없이는 불가능했다.1961년 겨울, 서울대 화학공학과 4학년이던 이태섭씨는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공허한 마음을 추스리며 졸업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얼마 전 어느 교육단체의 주선으로 한달간 미국 여행을 다녀왔다. 그가 본 미국은 풍요롭고 활력이 넘치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할 수 있다면…. 부모를 여의고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하고 있는 그에게 미국 유학은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경기고 동창 조의웅(기업인)씨가 불쑥 찾아와 "태섭이를 꼭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있다"며 '풍한산업 김영구 회장'이라고 쓰여진 명함을 건넸다. 당시 김 회장은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 삼호그룹의 정재호 회장과 더불어 3대 부호로 꼽히던 기업인. 함경남도 정평 출신으로 52년 풍한산업을 설립해 면방직물 수출로 크게 돈을 벌었다. 그런 그가 일면식이 없는 고학생에게 무슨 볼 일이 있는 걸까. 이태섭은 다음날 서울 을지로의 풍한산업 회장실을 찾아갔다.

"학생이 이태섭인가? 미국 유학을 가고 싶다면서…. 돈 걱정은 말고 유학 준비를 하게."

알고 보니 김 회장은 조의웅씨의 부친(당시 풍한산업 임원)을 통해 이씨의 사정을 들은 터였다. 이씨는 전국의 수재가 모인 경기중고 재학 6년간 수석을 차지해 이름이 꽤 알려져 있었다. 그의 경기고 졸업성적(97점)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꿈만 같았습니다. 김 회장은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키우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위한다는 생각에서 일면식이 없는 저에게 조건없는 지원을 한 것이지요."

63년 이씨는 불가능하게 여겼던 MIT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아침마다 머리 감고 빗질하는 것이 귀찮아 아예 스포츠형 머리로 깎아 버렸다. 새벽까지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밤을 하얗게 새는 날도 많았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석사 학위를 거치지 않고 시작한 박사 학위를 2년 8개월만에 받았다.

김 회장과의 인연은 이씨가 MIT 박사 학위를 받고 석유회사 쉘의 수석연구원으로 일하다가 귀국하면서 다시 이어졌다. 김 회장은 불과 33세의 이씨에게 풍한산업 상무 자리를 맡겼다. 이씨는 패기와 열정으로 일해 풍한산업의 계열사 우풍화학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태섭 사장은 전문 경영인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70년대 후반 젊은 인재를 찾는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김 회장은 기업 이익에 앞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고 사람과의 인연을 중시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사람을 한번 믿으면 끝까지 신뢰하는 김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보면서 감화를 받았지요."

인연을 중시하라는 김 회장의 당부는 이씨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이씨는 70년대 중반 경기고 선배인 김우중 대우 회장으로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여러 번 받았다. 급성장하는 젊은 기업 대우에 마음이 끌리기도 했으나 김영구 회장과의 인연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김우중 회장이 김영구 회장의 허락을 받고서야 이씨는 대우엔지니어링 초대 사장으로 옮겼다. 김영구 회장은 1999년 노환으로 타계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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