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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세상은 살만하다" 속편 약속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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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세상은 살만하다" 속편 약속해놓고…

입력
2003.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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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삼 선생,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 떠나셨구려. 찬 겨울 새벽 바람처럼 휑하니 들려온 소식에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오.당신이 작년 여름 방사선 치료를 시작할 때만해도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소. 9월초 당신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어요.

세상에 기적이라는 게 있다면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그렇게 마음으로 빌었다오.

남산 드라마센터 개관 작품으로 '햄릿'을 공연할 때 당신을 처음 만나던 때가 지금도 눈에 선한데 그게 벌써 40년 전 일이오.

그때 나는 클로디어스 왕을 맡은 배우였고 당신은 막 미국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영문학자이자 극작가 아니었소. 드라마센터 근처에 있는 당신 집에서 술을 마시며 로렌스 올리비에의 '햄릿'과 존 길가드의 '햄릿'을 비교해보던 기억이 그야말로 엊그제 같습니다.

당신은 학자답지 않게 키가 180㎝이 넘는 건장한 체격에다 평양 출신이라 말투도 강했지요. 학창 시절에는 배구 선수로 뛰었고 서울 와서도 배구 심판을 한 적이 있었다지요. 무뚝뚝하고 칭찬을 별로 안 했지만 내게는 자상하고 따뜻한 친구였소. 예술원 회원이 된 뒤로 편하게 술 한잔 같이할 수 있는 친구였잖소!

기억 나시오, 몇 해전 내게 자서전 쓰라고 권했던 일.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로 말하면 됐지 뭘 새삼스럽게 글을 쓰겠냐며 마다했더니 희곡으로 내 인생을 엮어 보겠다고 하셨지. 처음에 나는 회의적이었소. 무슨 기념 공연 해서 성공한 적을 본적이 없거니와 우리 같은 칠십 노인이 쓰고 연기하고 하는 연극을 누가 와서 즐겁게 보고 공감해주겠는가 싶어서.

하지만 당신이 극작가로써 정말 써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내 그랬잖소. 그게 동숭 아트센터에서 공연한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였는데, 강의가 있는 날도 끝나자 마자 택시를 타고 연습실로 달려올 정도로 당신은 열의를 보이셨지. 나중에 선생 부인이 내게 그럽디다. 그 작품 쓰느라 원고지 3천장을 버렸다고.

그때 당신 내게 약속하지 않았소?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2편을 쓰겠다고. 문병 가려고 했을 때 내 면회를 사양했다길래 나에게조차 아픈 모습 보이기 싫어하는 그 기백이 있으니 분명 자리를 털고 일어나리라 굳게 믿었다오. 이번에는 대사가 많아도 투덜거리지 않으려 했는데.

인생이란 참으로 짧은 연극 한 편이 이제 끝나고 관객들은 하나 둘 떠나는구려. 친구 편히 가시오.

장 민 호 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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