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침체와 설비투자 감소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수출이 크게 늘어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수출이 우리 경제를 다시 먹여 살리고 있는 셈이죠."30일 무역의 날을 앞두고 현오석 무역연구소장은 최근 수출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우리사회에선 '수출 입국'의 구호가 구시대의 유물인양 여겨지고 '수출보다는 수입을 해야 돈을 벌 수 있다'는 논리가 확산됐다.
그러나 한국 경제의 견인차는 역시 수출이다. 한국 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게 되자 수출은 다시 한국 경제의 구원 투수로 등장하고 있다. 고성장 시대 코리안 특급 열차의 초강력 엔진이었던 수출이 다시 르네상스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10월 경상수지가 25억2,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 5월 이후 6개월째 흑자 행진을 지속했다고 27일 밝혔다. 이 같은 흑자 규모는 9월의 22억5,000만 달러보다 2억7,000만 달러가 늘어난 것으로 월간 기준으로 51개월만의 최고 수준이다. 경상수지가 흑자가 난 것은 다름 아닌 수출 증가에 힘입은 것이다. 한은은 10월 수출이 191억4,000만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 상품수지 흑자가 급등한 점을 경상 수지 흑자의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올해 우리나라의 수출실적은 축포를 터뜨려야 할 정도다. 10월까지 수출액은 1,559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17.9%나 증가했다. 이러한 추세가 이어질 경우 올해 전체 수출액은 대략 1,920억 달러에 이르러 2,000억 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는 증가율면에선 90년대 이후 세 번 째이나 연간 300억 달러가 증가한 것으로 절대액 면에서 사상 최대이다. 특히 중국에 대한 수출은 279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무려 47.9%나 늘어났다. 이에 따라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우리의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수출이 우리 경제의 근간이라는 사실은 여러 통계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의 무역 의존도는 64년 17.6%에서 지난해 66%까지 확대됐다. GDP에 대한 수출 의존도도 같은 기간 3.8%에서 34.1%로 성장, 수출이 우리 경제 성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수출증가액을 GDP증가율로 나눈 수출의 성장기여율도 60년대 9%대에서 2000년대(2000∼2002)에는 91.9%로 크게 확대됐다.
또 총생산의 23.3%, 소득의 20.3%, 고용의 17.6%는 수출에 의해 유발되고 있어 만약 수출이 없다면 391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것이 한국무역협회의 조사 결과다. 더군다나 제조업 일자리의 경우에는 82.2%가 수출에 의해 유발되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김재철 회장은 "우리나라는 원유, 천연가스, 금속광물 등 기초 원자재를 매년 300억 달러 이상씩 수입하지 않으면 기초 생활이 불가능한 국가"라며 "이러한 외화는 결국 수출을 통해 조달될 수밖에 없고 무역의 국민 경제 기여도를 고려할 때 수출은 앞으로도 여전히 우리의 지상 과제가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한국무역 40년 발자취
1964년 11월30일 수출 1억달러 돌파를 기념해 제정된 무역의 날이 올해로 40회를 맞이한다. 64년 당시 수출은 1억1,905만8,000달러, 수입은 4억435만1,000달러였다. 40년 사이 수출은 무려 1,612.6배, 수입은 441.4배로 성장한 것이다.
사실 86년까지 무역의 날은 수출의 날이었다. 87년 세계화를 위해 수입도 늘려야 할 형편이 되면서 무역의 날로 이름을 바꿨다. 우리나라가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 전략을 채택하게 된 사연은 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 자원이 부족해 원자재를 수입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가 경제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이 당시 경제팀의 공감대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출입국을 통한 조국 근대화'를 표방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이러한 수출 입국의 과정에서 빼 놓을 수 없는 2개의 사진을 꼽으라면 바로 구로공단과 종합상사이다. 구로공단은 의류, 봉제 등 수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65년부터 73년까지 총 60만평 규모로 조성된 국내 제1호 산업단지였다. 당시 농촌의 어린 소년과 소녀들이 구로공단으로 몰려 들어 공단 주변에는 대규모 벌집촌도 형성됐다.
이렇게 만든 물건을 상사맨들이 전세계 방방곡곡 시베리아 땅 끝에서 열대사막에 이르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팔았다. 사실 70년대 상사맨은 대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종이었고 미혼 여성들 사이에서도 최고 신랑감으로 꼽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한국 무역 40년의 발자취에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73년 배럴당 2.6달러이던 유가는 1년만에 11.7달러로 치솟으며 수출위주의 경제성장 전략에 제동이 걸리고 심각한 경기 침체를 맞았다.
다행히 85년 선진 5개국 정상회담(플라자회담)이 엔화절상에 합의한 후 환율, 금리, 유가가 모두 낮은 3저시대가 개막되며 역사이후 최대호황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97년 한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로 전락한다.
사실 수출 호황기가 우리 경제의 전성시대였고 수출이 안될 때 한국 경제도 시련기를 겪었다는 점에서 한국 무역사는 한국 경제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박일근기자
■운동권에서 수출 역군으로 / 총학생회장 출신 VK 이철상 사장 1억弗 수출탑 수상
"고용창출이나 산업의 파급력을 고려하면 제조업, 특히 수출 업체들이 국가 경제의 근간이 돼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28일 열리는 무역의 날(30일) 행사에서 1억달러 수출탑을 수상하는 휴대폰 개발·제조업체 VK의 이철상(36·사진) 사장은 학생운동 출신 가운데 드물게 제조업으로 성공한 수출 역군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 그는 1990년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이듬해에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부의장을 지냈다. 대학졸업 후 재야 운동단체인 전국연합에서 활동하다 결혼과 함께 다가온 생계문제를 해결하려고 97년 9월 사업에 뛰어 들었다. 당시 벤처 열풍을 타고 바이어블 코리아(Viable Korea)라는 2차 전지 회사를 차린 그는 운 좋게 서울대 응용화학부 오승모 교수의 도움으로 일본 소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리튬폴리머 전지를 개발했다.
삼성전자에 휴대폰 전지 공급계약을 따내고 양산체제를 갖추는 등 승승장구하던 회사는 2000년 초 부터 시작된 일본 회사들의 덤핑 공세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2001년 11월 '제2의 창업'을 결심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당장의 덤핑 공세도 문제였지만 미래의 비전에서도 전지 사업은 유망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장은 아예 휴대폰 완제품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회사 이름도 VK로 바꾸었다.
지난해 1억2,000만 달러를 수출한 VK는 올해 1억5,000만 달러는 너끈히 수출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사장은 어렵던 시절 '돈 많은 사람이 1억원 쯤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기억을 떠올리며 재야단체를 돕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내년 총선 출마설에 대해서는 "운동권 출신 중 많은 사람이 정계에 진출한 만큼 수출 전선을 지키는 이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웃었다.
/이종수기자 j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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