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주화운동 유언비어 유포.' '제2의 김대중 내란음모 기도.' '전두환 대통령 시해 모의.' 1981년 8월 20일 대전지검은 이러한 3가지 어마어마한 범죄 혐의로 '아람회'라는 반국가단체 멤버 10여명을 구속 기소했다. 이들 중 7명이 1심에서 징역10년∼2년을 선고 받았다(82.2.11). 그러나 고등법원은 반국가단체 구성 부분을 무죄로 판결해 5명에게 징역6년∼1년6월을 선고하고 2명을 집행유예로 석방했다(82.6.19). 하지만 고법의 판결은 대법원에 의해 파기(82.9.28)됐고, 고법은 다시 징역10년∼1년6월을 선고해(83.2.16) 대법원에 의해 형이 확정됐다(83.6.14). 5번의 재판이 끝난 6개월 후 '반국가단체 구성원 5명'은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83.12.23).정해숙(48·서울 봉천국교 교사·이하 81년 당시) 황보윤식(33·대전공업고등기술학교 교사) 박해전(28·서울 용문중 교사) 김난수(28·육군 대위) 김창근(27·천안경찰서 순경) 이재권(26·금산 신용금고 직원) 김현칠(27·대전검찰청 직원) 등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7명이 '아람회'의 회원이 된 사연은 기이하다.
모두 하는 일이 제각각인 이들의 공통점은 충남 금산. 금산 출신의 정해숙씨는 함석헌 장준하씨를 흠모했고 함석헌씨가 설립한 구하고등공민학교 교장과 금산여고 교사를 지냈다. 이후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고향에서 '씨알운동'을 하고 있었다. 황보윤식(皇甫允植·현 인하대 인문과학연구소 상임연구원)씨는 과거 금산고등학교에서 역사교사로 교편을 잡을 때 박해전 등 5명의 제자들을 만났고, 이후 이들과 함께 민족과 통일문제, 광주민주화 운동의 실상 등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81년 5월 17일 당시 정훈장교(국민대 학군단15기)로 충남대 대학원에 수학 중이던 김난수 대위의 집에서 딸 백일잔치가 열렸다. 주범으로 몰려 징역10년을 선고 받았던 박해전(현 인터넷신문 참말로 대표)씨의 증언. "김 대위 딸의 이름이 '아람'이었다. 금산고교의 교지 이름도 '아람'이었다. 우리가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회합(會合)'이 필수적이었고, 사건의 피의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은 그날의 백일잔치가 유일했다. 결국 '아람이 백일잔치 모임'이 존재하지도 않은 아람회를 결성한 회합으로 둔갑한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 최초의 공안사건으로 1달 이상의 불법구금 동안 극심한 고문으로 만들어진 아람회 사건의 핵심은 '5·18 유언비어 유포'와 '제2의 김대중 내란음모 기도'. 박씨의 증언.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80년 5월 23일 천주교 신자였던 김현칠이 2장의 유인물을 가져왔다.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가 만든 '전두환 광주 살육 작전'과 천주교사제단이 만든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이었다. 언론보도만 접했던 우리로서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유인물 끝에는 '이 글을 읽은 분들은 이 사실을 널리 알려달라'는 호소가 붙어 있었다.
정해숙 선생이 직접 원지를 긁고 이재권(99년 사망)이 근무하던 신용금고 사무실에서 등사를 했다. 500여장을 만들어 금산 천안 조치원 홍성 대전 등에 있던 고교동창을 중심으로 배포했고, 이 복사물은 서울에까지 퍼졌다. 당국은 유인물의 근원지를 찾아 전국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꼬리를 잡지 못했다. 1년 뒤 황보윤식 선생의 '이상한 발언'이 신고돼 당국이 수사에 들어갔을 당시 검거된 이재권의 집에서 남아있던 이 유인물이 발견됐다."
아람회 사건이 '제2의 김대중 내란음모 기도'로 몰린 것은 정해숙씨와 박해전씨가 이른바 '서울의 봄' 기간에 연금 중인 김대중씨 집을 방문한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박씨의 설명. "80년 2월13일 저녁 당시 동교동에 드나들던 안모씨의 소개로 정해숙 선생과 함께 김대중씨 집을 방문했다. 이 자리서 우리는 김대중씨로부터 시국상황을 설명듣고 그에게 기대와 공감을 표하고 나왔다. 그 사실이 1년 반 뒤에 '남아있는 김대중씨 지지세력을 모아 내란을 모의했다'는 범죄의 근거가 된 것이었다."
딸의 백일잔치를 마련했던 김난수(현재 대전서 개인사업)씨는 현역 대위 신분으로 군법회의에서 징역4년을 선고 받았다. 그의 죄목에는 '전두환 대통령 시해 모의'라는 대목이 추가됐다. 황보윤식씨의 설명. "당시 김 대위는 육본의 군사전문요원 양성 시험에 합격해 군장학금으로 80년 2월 25일부터 충남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사석에서 계엄군의 광주민주화항쟁 폭력적 진압에 대해 울분을 토했고 '전두환 일당을 용서할 수 없다. 진급해서 청와대에 갈 기회가 오면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말들이 '대통령 시해 기도'로 변했고 '대통령을 저격하려고 숨겨놓은 권총을 내놓아라'는 수사관들의 추궁에 그 역시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다."
한편 아람회 사건 피해자들은 2000년 4월26일 재심을 청구했다. 이들은 2001년 10월 16일에 이어 2003년 11월 19일 서울고등법원에 신속한 재판을 촉구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비슷한 시기에 재심 청구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청구인 18명)은 2003년 1월21일 전원 무죄가 선고됐다. 당시 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청구인에 포함되지 않았던 김 전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재심을 청구, 11월 17일 재심개시를 결정했다. 또 81년 7월 부산지역 용공조작 사건으로 알려진 '부림 사건'(노무현 대통령이 당시 무료변론을 맡았음)의 경우 2003년 9월18일 재심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아람회 "지도교사" 황보윤식씨
대전공업고등기술학교 역사교사로 근무 중이었다. 숭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금산고등학교 교사 재직시 인연을 맺었던 제자들이 종종 나의 집과 학교를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80년 이후 화제는 당연히 5·18 광주민주화 운동이었다. 아람회 사건의 '수괴'격인 정해숙 선생과 '지도교사'격인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피의자가 금산고교 제자들이었다. 박해전은 당시 친구들과 함께 '민중교육청년협의회'라는 순수한 교육서클 형태의 모임을 구상하고 있었다. 물론 아람회라는 명칭은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기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우리는 종종 만나 시국 얘기를 했고, 나는 주로 통일과 민족의 얘기를 많이 했다. 5·18 이후 당연히 광주민주화운동이 주된 화제였다. 81년 5월 17일 제자인 김난수 대위의 딸 백일 잔치가 있었다. 나와 정해숙 선생은 물론 충남대 학군단장 등 그의 군대 친구·상사, 고교 동창과 친척 등 30여명이 모였다. 전형적인 백일잔치였다. 6월 27일 평소 가깝게 지내던 학생들과 함께 금산군 부리면 수통리 계곡으로 1박2일 수련회를 갔다. 그해 9월 내가 대만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됐고, 정훈장교로 대학원 공부를 하던 김 대위도 부대로 복귀하게 돼 겸사겸사 마련된 자리였다. 30∼40명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언제나 하는 얘기들을 했고 나는 학생들에게 민족과 통일에 대한 역사관 등을 설명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날 수련회에 참석한 학생 몇몇이 '황보 선생이 이상하다'고 당국에 신고를 했던 것이다. 민족과 통일을 이야기 한 것이 '빨갱이 짓'이 돼 버렸다.
2개월쯤 뒤인 7월 16일 오후,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급한 일로 학부형이 찾는다'는 전갈을 받았다. 밖으로 나오니 정체불명의 사나이 4명이 나를 둘러쌌다. 그 중 한명이 "황보 선생 좀 갑시다"고 말하는 순간 다른 한명이 내 옆구리에 권총을 들이댔다. 교문 밖에는 승용차가 대기중이었다. 눈이 가려진 채로 한참을 달려 지하실 철장 속으로 끌려갔다. 대전경찰서 보문산 대공분실이었다. 검찰에 기소되기까지 33일 동안 일체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으며 수사관들이 만들어 놓은 '반국가단체 구성 조서'에 강제로 날인했다. 우리들 모임의 중심에 있었던 박해전에게는 '김일성 장군을 위해 죽는다'는 유서까지 강제로 쓰게 했다. 서울에서 왔다는 한 수사관이 우리 모두를 면담하기도 했는데 그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었음은 나중에 알았다.
나의 수첩에 적혀있던 친구들이 한명도 빠짐없이 끌려왔다. 현역 경찰들도 상당수 있었고 교수들도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숭실대학 재학시절 도산 사상을 연구하는 '수양동우회'라는 서클 멤버들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박해전 김난수 등 금산고교 제자들을 알지 못했다. 다들 무관함이 입증됐으나 당시 숭실대 철학과 모 교수는 나를 통해 일부 제자들을 알고 있었다는 이유로 1심 재판 때까지 6개월 이상 구속돼 있었다. 수사관들은 자신들의 구상대로 사람과 조직이 엮어지지 않자 그것이 '빨갱이 점조직 수법'의 증거라며 더욱 나를 고문했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검찰은 공소유지를 위해 나의 제자들인 고교 재학생들을 여러명 증언대에 세웠다. 그들은 주로 나의 '용공 발언'을 증언하기 위해 동원됐는데 나중에 그들은 나를 찾아와 '사건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다'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용공 조작 사건의 배후 주범이 된 데는 나의 특이한 '전과'가 한몫을 했다. 학군단으로 72년 입대, 공군본부에서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78년 말과 79년 초, 일부 지식인과 친구들을 대상으로 편지를 썼다. 사신 형태로 100여장을 보냈다. 내용은 "박정희 철(鐵)의 정권을 무너뜨리려면 힘으로는 안 된다. 정신적으로 무장하여 문화혁명 형태로 온 국민이 총궐기 해야 한다"는 요지였다. 한 친구의 주소를 잘못 써서 편지가 모 영어학원으로 갔는데 그 학원 직원이 우연히 수취인과 동명이인이었다. '수상한 편지'는 곧바로 당국에 신고됐다. 발신인으로 내 이름만 기재했는데 3개월 후 체포돼 서빙고동 보안사 분실로 끌려갔다.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3년형을 선고 받고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 중 10·26 이후 석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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