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도 ‘올드 보이’와 ‘킬빌’ ‘프리다’ 못지않은 감흥·감동을 안겨줄 작품들이 개봉되었다. ‘비디오를 보는 남자’ 와 ‘사랑의 시간’ 등이 그들이다. 워낙 ‘작은 영화’들이기에, 위용 면에서는 초라하기 짝이 없지만.‘비디오…’는 서강대 영상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김학순 감독이 기획 8년, 촬영 종료 1년 9개월 만에 극적으로 선보이는 눈물과 감격의 수작이다. 틈틈이 비디오를 보며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없이, 무욕(無慾, 혹은 무기력)의 삶을 영위하는 한 이혼남(장현성)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휴먼 드라마.
영화 속 다양한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에는 그저 하찮다고 일축ㆍ외면할 수만은 없는 어떤 진정성 내지 진실이 살아 숨쉰다. 일찍이 ‘8월의 크리스마스’나 ‘파이란’ 등에서 체험한 바 있는 소중한 덕목이. 이 남루한 영화가 단연 빛을 발하는 건 무엇보다 그 때문이다. 절제 생략 여백을 주로 하면서도 영화적 재치와 여유를 포기하지 않는 입체적 연출을 통해 감독은 결코 쉽지 않았을 그 진정성을 성공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감독은 자극적 사건이 부재하는데도 관객들이 지루해 할 틈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극적 리듬을 구현하는 데도 성공한다. 감독의 역량이 가장 빛나는 곳은 그러나 연기 연출에서다. 방은진이야 소문난 연기파이니 그러려니 치자. ‘나비’ 등에서 이미 인상적 연기를 보였던 장현성은 영화에서 감히 ‘배우의 발견’이라고 평하고 싶은 열연을 펼친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를 떠오르게 하는 열연을.
‘사랑의 시간’(1990)은 영화사 백두대간의 ‘한 지붕 세 감독의 씨네 릴레이’ 마지막 작품이다. 키아로스타미와 더불어 이란 현대 영화를 대표하는 거장 모센 마흐말바프의 초기작이다. 한 여자와 두 남자를 축으로 벌어지는 세 가지 버전의 주목할 만한 사랑 이야기.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은 사회파적 리얼리스트(‘사이클리스트’, ‘칸다하르’)나 탐미적 영상주의자(‘가베’)와는 또 다른 실험적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뽐낸다.
동일한 인물들이 세 가지 이야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롤라 런’ 등의 옴니버스 형식을 연상시키나, 영화는 여타의 옴니버스 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랑·삶에 대한 심상치 않은 성찰을 안겨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세련된 극 구성은 말할 것 없고 그 성찰 등으로 인해 영화는 이란 영화 일반을 향한 어떤 편견을 상당 정도 뒤흔들 성도 싶다.
물론 일반관객들은 이들보다는 역사와 설화를 적당히 뒤섞은 환상적 SFX(특수효과) 시대사극 ‘천년호’에 끌릴 것이다. 정준호 김효진 김혜리 출연진도 그렇거니와, 와이어 액션 연출 등에서 이광훈(‘자귀모’‘닥터봉’) 감독은 수준급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하지만 여느 한국형 블록버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성긴 드라마로 인해 그 볼 거리가 다소 빚을 바랜 감이 없지 않다. 유감스럽게도.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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