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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5> 어린 시절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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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5> 어린 시절로의 여행

입력
2003.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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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내 가슴에 찬연하고 아름답게 아로 새겨진 어린 시절로 추억 여행을 떠나고 싶은 때가 있다. 가물가물해진 기억의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사촌 오빠의 자전거 뒤에 실려 소래 포구에서 인천으로 나들이 가던 내 모습이다. 이웃에 살던, 학생이던 사촌 오빠는 이따금 자전거에 커다란 대바구니를 싣고 와서 네 살 난 나와 상애 언니를 그 속에 앉히고 논둑을 덜컹덜컹 달렸다. 울퉁불퉁한 논길을 지날 때마다 수없이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때마다 언니와 나는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짧지만 신비로웠던 유년시절의 소풍은 내 기억의 창고에 남아있는 풍경 중 가장 소중한 장면이다.두 번째로 만나는 그림은 피란길이다. 전쟁이 터지자 어머니와 우리 네 자매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서울을 빠져나가는 피란민 대열에 끼었다. 전쟁이 뭔지 피란이 뭔지 모르던 나는 그저 어린 마음에 소풍 가는 아이처럼 흥분과 설레임으로 들떴다. 그런데 외갓집이 있는 강화도 쪽으로 가기 위해 막 한강을 건너려는 무렵 갑자기 비행기가 뜨더니 마구 총알을 퍼붓는 게 아닌가. 사람들은 옥수수 밭이나 개울에 얼굴을 처박았다. 참으로 눈깜짝할 사이 벌어진 일이었지만 민방위 훈련이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엎드려 혼자 중얼거렸다. "야, 이건 영화의 한 장면 같잖아." 우리는 계속 걸어서 밤 늦게야 김포에 닿을 수 있었다. 다음날 강화읍으로 들어간 우리는 6·25 전쟁 기간의 절반을 그곳에서 보냈다. 1·4 후퇴로 다시 피란길에 나섰을 때 우리 모녀는 월미도에서 배를 탔다. 갑판 아래도 4층까지 있는 엄청나게 큰 배라서 나같은 꼬마는 허리에 굵은 밧줄을 묶어 두레박처럼 배 안으로 내려졌다. 나중에 안 이름이지만 LST라는 피난민 수송 임무를 맡은 미군 선박이었다. 배는 제주도 성산포로 향했고 인정 많은 제주도 사람들은 주먹밥과 삶은 고구마를 가지고 나와 우리들 손에 일일이 쥐어줬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 추억의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창시절을 이야기할 차례다. 피란살이 하느라 나는 초등학교를 네 군데나 옮겨 다녔다. 서울 돈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제주도의 동 초등학교와 인천의 박문 초등학교를 거쳐 서울 미동 초등학교에서 졸업을 맞았다. 학교를 그렇게 많이 옮겨 다녔지만 전학을 갈 때마다 금세 동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학예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학예회는 연극, 무용, 노래 등 총천연색이던 내 재능을 한번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키가 자그마하고 통통해서 눈에 띄진 않았지만 몸이 유연하고 부드러워 몸놀림이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던 소녀는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신 고운 분홍색 무용복을 차려 입었다. 발레복을 흉내낸 짧은 무용복엔 층층이 프릴을 달았고 허리 뒤로 잘록하게 맨 커다란 리본까지 있었다. 그 무용복을 입고 '헝가리무곡 5번'에 맞춰 탬버린을 들고 춤추던 내 모습이 눈앞에 그림처럼 떠오른다.

나머지 6년의 학창 시절은 모두 효자동 근처의 진명 학교에서 보냈다. 진명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계비인 순헌황귀비(엄비)의 뜻으로 세워진 유서 깊은 학교였다. 하지만 내가 활동하고 싶었던 연극반은 없었다. 수학 선생님 한 분이 연극반을 만들어 경연대회에 나가고 싶어 했으나 학교측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나는 합창부와 무용부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연극반이 없어서 무척 서운했지만 무용과 성악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내게 약이 됐다. 합창부에서는 소프라노를 맡아 '글로리아'나 '푸른 도나우강'을 배웠고 무용부에서는 부채춤, 칼춤 같은 한국 전통 무용을 배웠다. 거기에 웅변 대회가 있을 때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교 대표로 나갔으니 공부는 뒷전이었다. 웅변 연습을 죽어라 열심히 했던 데는 남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국어, 역사, 지리, 세계사, 한문을 좋아 했지만 수학은 끔찍이 싫어했다. 수학 시간이 싫어지면 웅변 연습을 핑계로 수업을 빼먹었다. 이화여대 신문학과에 들어간 걸 보면 내 자신이 대견할 정도였다.

이렇게 세 개의 풍경이 내 어린시절의 모습들이다. 그저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지난날의 잊지 못할 몇몇 장면들은 가슴에 남아 때때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촛불로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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