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전쟁에서 패배하고도 살아 돌아왔느냐!"당나라 군대가 말갈군(靺鞨軍)과 연합해 신라를 침공하자 출전했다가 패하고 목숨만 건져 돌아온 아들 원술랑을 향해 김유신 장군은 분노를 쏟아 낸다. 어머니인 지소(智炤) 부인도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다며 외면한다. 집을 나와 시골에 숨어 살던 원술랑은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를 찾아갔으나, 역시 거절 당하고 태백산(太白山)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를 사모하는 소녀 진달래는 원술랑에게 사랑과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힘을 얻은 원술랑은 다시 전장으로 나아간다.
태어나 처음 접한 기성 극단의 연극은 한국전쟁이 터지기 직전 그러니까 여덟 살 때 부민관에서 본 극단 신협의 '원술랑'이다. 당대 최고의 배우 김동원 선생이 원술 역을, 전쟁 중에 월북했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인기가 많았던 여배우 김선영이 진달래 역을 맡았던 '원술랑'은 국립극장 개관 기념작이었다. 김동원 선생의 멋들어진 연기에, 김선영씨의 가냘픈 체구에서 울려 나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어린 나이에 본 연극이지만 지금도 그날의 무대가 눈 앞에 생생하다. 원술이 꿈꾸는 장면에서 해골과 뱀이 등장했다. 검은 타이즈를 입고 조명을 비추면 빛이 나는 무대용 특수 분장을 한 배우들이 얼마나 무섭고 으스스하던지. 소방호수로 만든 뱀은 또 얼마나 끔찍스럽던지. 가짜인 줄 알면서도 나는 무대가 만들어내는 마력에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인천 애관극장에서 본 '처용의 노래'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처용 역은 역시 김동원 선생이 맡았다. 상대는 윤인자라는 여배우였다. 텔레비전은 말할 것도 없고 라디오도 귀하던 그 시절 문화생활에 목말라 하던 관객들로 극장은 미어 터질 듯했다. 관객들은 "윤인자 허리 보러 왔다가 내 다리 깔려 죽는다"면서도 짜증을 내기는커녕 되려 즐거워했다. 그렇게 가난하지만 훈훈한 인정이 살아있던 시절, 연극을 보며 어린 나는 울고 또 웃었다.
"개골산 깊은 계곡 주름 잡아 헤매어도 왕자님 얼굴, 그 모습을 찾을 길 없군요" 지금은 사라진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마의태자'에서 최은희 선생은 비운의 낙랑공주 역을 맡아 가슴 저린 연기를 보여줬다. 낙랑공주의 비탄이 어린 마음에도 얼마나 절절하게 들렸으면 건망증 여왕인 내가 아직까지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까. 시공관에서 공연했던 '춘향전'은 오빠에게 도시락을 갔다 준다는 핑계로 열 두 번이나 보았다. 무대 바로 앞에 턱을 올려놓고 넋을 잃고 연극을 보던 코흘리개였던 내가 지금은 연극 배우입네 하고 있으니 가끔은 스스로 신기할 때가 있다.
'햄릿' '오델로' '춘향전' 등 어릴 적 내가 숱하게 본 연극들의 남자 주연은 거의 김동원 선생이 맡으셨다. 큰 키에 훤칠한 외모, 굵은 목소리 무엇 하나 모자람 없어 보이던 김동원 선생님은 내게 절대적 우상이었다. 무대에서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 내 가슴은 광한루에서 그네 타는 춘향이 마음처럼 설?다.
그런 김동원 선생님을 처음 가까이서 뵌 건 대학 시절이었다. 프랑스 발레단의 공연을 보러 부부 동반으로 이화여대 강당에 오신 김동원 선생님께 처음으로 사인을 받았다. 배우로부터 사인을 받은 것은 그때가 내 연극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인연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966년 '파우스트'에서 '리히스헨' 역을 맡아 김동원 선생님과 함께 출연할 수 있게 됐다. 우물가에서 물 긷는 동네 처녀 역할로 대사가 몇 마디 안 되는 단역이었다. 하지만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감히 이렇게 위대한 배우와 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볼이라도 꼬집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2차 공연부터는 한은진 선생님께서 맡으셨던 이웃집 과부 '마르테' 역을 대신 하기까지 했으니 그 기쁨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었을까. 연극계에서 모셔야 할 선배보다 보살펴줘야 할 후배가 더 많아진 요즘 아주 가끔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내 연극을 보고 자란 후배들이 나와 같이 무대에 서면 옛날의 나처럼 그렇게 가슴이 떨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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