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이맘때쯤 서울 광화문을 비롯해 전국의 밤을 밝히던 촛불들에는 인권과 자주와 평화를 향한 시민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그 염원에 크게 힘입어 노무현 정부가 태어났다. 그런데 '참여'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출범한 지 1년도 채 안된 지금, 정부는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을 반대하는 부안 주민들의 촛불 시위를 살벌한 방식으로 막고 있다. 정치란 게 늘 그런 거지 하며 편안한 냉소로 도피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참여정부의 탄생을 결정적으로 거든 힘은 시민들이 노무현 캠프에 투사한 윤리적 열정이었기 때문이다. 16대 대선이라는 연금술 대회에서 '노 후보'를 '노 대통령'으로 변화시킨 '현자의 돌'은 소박하다 할 억강부약(抑强扶弱)의 대의였다. 그런데 지금 참여정부의 실천은 자주 '억약부강'으로 휘어지고 있다.대통령은 이라크의 전쟁터로 우리 젊은이들을 더 보내겠다는 결정을 되돌릴 생각이 없는 듯하다. 힘이 약한 나라가 힘센 나라의 요구에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다. 더구나 미국처럼 한반도의 지정학에 깊이 개입돼 있는 강대국의 요구를 우리 정부가 물리치기는 특히 쉽지 않다. 그 요구가 지금처럼, 저들이 멋대로 저질러놓은 침략 전쟁의 뒤치다꺼리를 해달라는 기막힌 것일 때조차 그렇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그런 쉽지 않은 일을 하겠다고 자임했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그런 그를 지지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자신의 말을 실천에 옮길 지혜도, 용기도 없어 보인다. 그 지혜와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힘이 세든 약하든 미국의 거의 모든 동맹국이 합리적 계산 끝에 미국의 파병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우리 대통령의 안면근이라고 그런 난색의 표정을 짓지 못할 게 뭔가.
반면에 노동 운동에 대한 정부의 표정은 어느 새 차갑고 단호해져, 노-정 관계는 손배·가압류와 노동자 대량 구속의 물살에 실려서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당선자 시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방문해 "재계와 노동계의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겠다"고 말한 바 있는 대통령은 이제 희망을 잃은 노동자들이 잇따라 분신을 해도 태연하다. 외려 그는 "분신을 투쟁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고 노동자들을 훈계하는가 하면,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 단체가 아니다"라며 감정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노동계에 비판 받을 점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노동 단체들은 너무 조급해 보이고, 더러는 이기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부의 눈에는 늘 사용자들의 부당노동행위보다 노동자들의 불법 파업이 먼저 들어오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절망 속에서 자기 몸을 불사른 노동자들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한참 벗어난 것이다.
약자에 대한 정부의 힘 자랑이 부안에서만큼 인상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부안 상황을 이 지경으로까지 몰고 간 가장 큰 책임은 주민들의 의사를 힘으로 누르고 주민투표에 대해 이리저리 말을 바꾼 정부에 있다. 더구나 대통령은 사태 초기인 지난 7월, 주민들의 뜻을 거스르며 핵폐기물 처리장 유치를 신청한 김종규 부안 군수에게 직접 전화를 해 그 '소신'을 격려한 책임이 있다. 대통령이 그 전화에서 군수에게 약속한 '치안유지'는 이제 유사 계엄 상황으로까지 나아갔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민들의 반발이 도를 지나쳤다"며 상황의 책임을 지역민들에게 돌리고 있다.
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합법적 폭력의 사용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그 폭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바로 참여정부의 탄생을 반겼던 힘없는 사람들이다. 대통령과 정부가 권위와 자존심을 내세울 데는 그 힘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강자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약자에게 휘두르는 주먹만큼 보기 흉한 것도 없다.
고 종 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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