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민주화 이후 행정부와 입법부가 다른 정치세력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분할정부'가 반복적으로 출현하였다. 지역주의적 선거지형이 분할정부를 낳은 가장 큰 요인으로 지적되지만, 과거 권위주의 시대 무소불위의 제왕적 대통령을 견제해야 한다는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었다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과 집권여당의 분당으로 헌정사상 가장 극단적인 거야여소의 정치구도가 형성되었다.이러한 정치구도에서 국회의 절대다수의석을 점유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역할과 책임은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3권분립이 보장되어 있는 헌정구조 하에서 한나라당에게는 단순히 행정부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야당의 역할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입법부를 운영하는 반쪽 정부로서의 책무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원내 다수당인 한나라당과 정부가 충돌하여 정국교착을 초래하여 민주주의가 작동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한나라당은 반쪽의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소야대보다 여대야소 하에서 야당하기가 더 쉽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당은 원내 제1당이라는 유리한 입지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에 걸쳐 대선에서 패배하였다. 재집권의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수권정당의 면모를 보여주기보다는 선명야당을 내걸고 정권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네거티브한 대정부 투쟁을 벌인 한나라당의 후보를 국민들이 거부한 것이다. 연속적인 대선 패배 후 출범한 한나라당의 새 지도부가 정책정당으로의 변신을 시도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최병렬 대표는 취임 후 당 부설 여의도연구소를 정비하여 정책개발기능을 강화하고 지구당 폐지, 중앙당 축소, 원내총무 권한강화 등 원내정책정당화를 위한 당 개혁에 착수하였다. 여당인 민주당이 신당문제에 매달려 있을 때, 야당인 한나라당은 '민생투어'에 나서고 정책토론을 강화하는 등 여야가 뒤바뀐 모습도 나타났다.
그러나 재신임정국과 대선비자금 수사로 당이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고 판단한 한나라당은 정책정당노선에서 대여강경투쟁노선으로 회귀하였다. SK비자금 사건이후 한나라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대여 '공격수'들을 전면 배치하였다. 검찰의 대선자금수사에 맞서 대통령측근비리특검법안을 통과시켰고, 대통령이 조건부 거부권을 행사하자 국회의안 심의 거부, 단식, 농성 등 초강경 대응을 하고 있다. 물론 한나라당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통과시킨 특검법안을 대통령이 거부한 데 대해 불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부권을 재의결을 통해 무력화할 수 있는 권한이 국회에 보장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재의에 부치지 않고 장외투쟁에 들어간다는 것은 원내 다수당으로서의 책무를 포기하는 것이다. 한 여론 조사는 국민 대다수가 특검법의 재의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한나라당의 극한투쟁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원내 과반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국회파업은 국정을 마비·중단시키는 무책임한 행위로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다. 현재 새해 예산안 뿐 아니라 이라크 파병, 신행정수도 건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등 한나라당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는 중대한 국가 현안이 산적해 있다.
국민들은 특검법 거부를 볼모로 장외투쟁을 하는 거대야당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한나라당을 단순한 야당이 아니라 국정의 반쪽을 책임지고 있는 원내 다수당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만큼 국민은 한나라당에 대해 권한에 걸맞은 책임을 요구하고 있고 국가적 현안에 대해 비전과 대안을 듣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다시 다수당으로 만들어줄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한나라당이 가야 할 길은 정책정당이다.
임 혁 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