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의사라는 전문직업인으로서 성장하기까지 잊을 수 없는 몇 분의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중 한명이 1987년 미국 휴스턴의 앤더슨 암센터에서의 연수과정에서 만난 마크 블릭 선생이다.그는 원래 나와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나를 초청해준 부인과 연구실에서 주로 암세포와 면역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고, 그는 혈액종양내과 교수였기 때문이다. 연구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6개월 정도 지나서 부인과에서 하고 있는 연구가 한국에선 첨단 분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연구실에서 진행되는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 과정에서 마크 블릭 선생의 암유전자 연구에 대해 정보를 얻었다.
블릭 선생은 에이즈 바이러스를 발견한 겔로 박사 밑에서 종양유전자연구에 대해 훈련을 받았으며 당시 몇 명 안 되는 종양분자유전학의 전문가였다. 그러나 나를 초청해 준 연구실이 아닌 다른 연구실에서 일하는 것은 비자문제를 비롯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첨단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불면의 밤을 수없이 보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조건 그를 찾아가 떠듬거리는 영어로 내 사정을 털어 놓았다. 당시 첨단 분야였던 분자생물학에 대해서 아무 경험이 없는 임상의사가 암유전자 연구를 하고 싶다는 얘기를 들은 그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난감해 보였다. 그는 내일 다시 상의하자고 했다. 다음 날 내 의지가 확고한 것을 안 그는 같이 일할 것을 허락하고 연구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는 부인과 연구실에서 실험하고 저녁때는 아래층의 분자유전학연구실에서 실험하는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새벽 3, 4시에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마침내 종양조직에서 핵산을 뽑아내 효소로 잘게 자르고 전기영동을 해 드디어 첫 번째 실험결과를 얻게 됐지만 당시 그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실험결과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블릭 선생이 더 흥분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난소암의 암억제유전자에 관한 첫 번째 연구결과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 한 장의 사진결과만 가지고 첫 번째 논문을 당시 미국 암학회지에 실을 수 있게 됐다.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것이 인연이 돼 나는 부인과와 내과의 공동 부담으로 연구비와 월급을 받으며 1년 더 일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연수는 대부분 자기부담으로 이뤄졌다.
블릭 선생은 연구를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기 실험실을 개방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격려하는 성격이었다. 만약 그의 그러한 면이 없었다면 내 연구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한국에 돌아와 젊은 의사나 학생에게 실험실을 공개하고 같이 연구하는 것을 즐기는 것은 바로 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제 호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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