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이상의 많은 사람들은 1960∼70년대를 춥고 배고팠던 시절로 기억한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51·대한 수영연맹 이사)씨에게 장형숙(71·사업)씨는 바로 그 시절 춥고 배고픔을 해결해준 평생 은인이요, 오늘의 자신을 만든 스승이다.전남 해남고 1년생이던 16세의 조오련은 68년 11월 '무작정' 상경했다. 빈농 집안의 10남매 중 막내인 그는 형편상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있었다. 수영이었다. 전국대회서 3위 안에만 들면 체육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그는 삼각동 조흥은행 뒤의 간판집 점원으로 일하며 틈틈이 종로 2가 YMCA에서 수영 연습을 했다. 그때 그의 꿈은 전국대회 우승도, 아시아 제패도 아니었다. 수영을 잘 해 학교를 마치겠다는 것뿐이었다.
"두 달쯤 지났을 무렵이에요. YMCA 수영 회원이었던 장형숙 선생님이 어느날 저에게 '고등학생 같은데 학교는 안가고 수영만 하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 사정을 말씀드렸죠."
사연을 들은 장씨는 "뜻은 좋은데 수영법이 틀렸다"며 조오련에게 발차기를 시켰다. 그리곤 장씨는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사우나를 한 뒤 1시간쯤 지나 수영장으로 돌아왔는데 그때까지 조오련이 발차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보통 사람들은 발차기를 5분 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수영선수로 활동했던 장씨는 '이놈 봐라? 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데리고 나가 점심을 사 먹이고 다음 날부터 훈련이 시작됐습니다." 그 해 봄 삼일고가도로 건설로 간판집이 철거되자 장씨는 아예 조오련을 자신의 집에 기숙시켰다. 훈련은 독특하고, 힘들었다. 장씨는 고무튜브로 조오련의 손이나 발을 묶고 동작을 연습시켰다.
"한번은 제가 잘못된 손동작을 반복하자 선생님이 제 손등을 발로 밟으며 야단을 치시더군요. 그리고 훈련이 끝난 뒤 '아프지 않았냐'며 미안해 하시는 거예요. 저는 '다 저를 위해서 그러신 것 아니냐'고 말했죠." 장씨는 이에 감명을 받아 이후 더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조오련의 데뷔 무대는 69년 6월29일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 17세에 불과했지만 학교에 적(籍)이 없어 무소속으로 대학·일반부 400m와 1,500m에 출전했다. 놀랍게도 두 종목 모두 우승이었다. 장씨는 친분이 있던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을 찾아가 조오련을 태릉선수촌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조오련의 대표 발탁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상경한 지 불과 8개월 만이었다.
장씨의 지도는 계속됐다. 당시로선 선구적인 '킥턴'도 가르쳤다. 그때까지 모든 선수들은 반환점을 손으로 터치한 뒤 돌았는데 발로 하는 킥턴은 한번 할 때 1초씩 단축되는 놀라운 기술이었다.
덕분에 조오련은 모든 대회를 한국신기록으로 우승했다. 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는 400m는 11초, 1,500m는 1분을 단축시킨 아시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그때로선 불가능으로 여겼던 수영 금메달은 전국을 들썩거리게 한 감동의 드라마였다. 조오련은 장씨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이러한 기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장 선생님은 저의 잠재적 가치를 처음 인정해 준 분이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대표팀 코치에게 무시당하면서 맞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시며 '마음 강하게 먹어라'며 다독거려주시더군요. 저는 그 눈물의 의미를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그분은 형식이 아닌 진실로 나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대표가 된 뒤에도 4∼5년을 더 그분 집에서 기숙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의미는 아버지 이상입니다."
/유승근기자 us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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